한국일보

박찬욱, 운명이 쥐어준 ‘이중성’을 말하다

2024-04-12 (금)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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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 감독의 HBO 오리지널 ‘동조자’ 14일 공개

▶ 제작·각본·연출 전과정 ‘쇼러너’ 총괄
▶동양적·서양적 자아 비극의 고뇌 담은 베트남 전쟁의 이중간첩 이야기 그려내
▶풍자적 메시지·미장센 등 기대감 고조

박찬욱, 운명이 쥐어준 ‘이중성’을 말하다

‘동조자’의 주인공 캡틴은 호아 쉬안데(왼쪽)가 열연했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하원의원, 영화감독, 교수, CIA 요원 1인4역을 소화했다. [HBO 제공]

박찬욱, 운명이 쥐어준 ‘이중성’을 말하다

HBO 오리지널 ‘동조자’의 공동 쇼러너로 참여해 제작, 각본, 연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총괄한 박찬욱 감독. [로이터]


칸 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과 퓰리처상 수상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만남으로 주목 받은 ‘동조자’가 드디어 베일을 벗는다.

오는 14일 HBO와 MAX에서 공개되는 7부작 ‘동조자’(The Sympathizer)는 1970년대 베트남전 직후 베트남과 미국 사회의 이면을 이중간첩인 주인공 캡틴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첩보 스릴러물이다. 베트남계 미국인 비엣 타인 응우옌(51)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박찬욱 감독이 공동 쇼러너로 참여해 제작, 각본, 연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총괄했다.

9일 할리웃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열린 LA프리미어에서 박찬욱 감독은 “(HBO에서) 쉽지 않은 소재에, 적지 않은 예산을 쏟아 부어서 만드는 용기있는 결정을 해주었다”고 서두를 꺼냈다. 이어 쇼러너로 함께 이름을 올린 돈 맥켈러에게 “캡틴(주인공)의 머릿 속에 동양적인 자아와 서양적인 자아가 있는 것처럼, 우리 둘이 합쳐서 하나의 인격을 이룬 듯 그렇게 팀으로 일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박 감독의 ‘동조자’는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베트남에선 미국 전쟁으로 불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로 포문을 연다. 그리고 “모든 전쟁은 두 번 싸운다. 전장에서 처음으로, 두 번째는 기억 속이다”라는 문구에 이어 폭력과 분단의 종결, 자신 안의 분열 종식을 원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두 개의 마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 탓에 양면에서 바라보는 비극을 지닌 주인공(캡틴이라 불리는 이중간첩)은 베트남 배우 호아 쉬안데가 혼신을 다한다. 7개의 에피소드 중 1~3회는 박찬욱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았고 시청자에게 변수가 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산드라 오, 존 조, 데이비드 듀코브니 등이 조연으로 출연한다.

박 감독은 “이 시리즈에는 혼자서 4개의 남우조연상을 받을 만한 배우가 한 명 있다”며 독보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배우이자 시리즈 제작자로 참여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추켜세웠다. ‘동조자’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하원의원, 영화감독, 교수, CIA 요원 1인4역을 소화한다. 정치적 지도력, 도덕적 권위, 사회적 특혜, 재산의 통제권을 독단적으로 휘두르는 사중적 인물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여러 백인 캐릭터를 한 명의 배우에게 맡긴 것은 전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결정이었다. 제국주의 권력체계가 서로 얽혀 있고 중첩되어 있다는 ‘동조자’의 핵심 메세지를 확연하게 만든 묘수다.

그리고 원작의 첫 문장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 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라는 주인공 나(캡틴)의 독백은 미장센의 대가 박찬욱 감독을 만나 영화적 순간을 경험케 한다. 박 감독은 “(비엣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영상이 더 나은 점, 문학이 갖지 못한 것이 한 가지는 있다. 이 소설은 영어로 쓰여졌지만 우리 쇼에는 베트남어 대사를 베트남어로 들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베트남에서 원작 소설의 출판이 거부되고 시리즈 제작 역시 베트남 정부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태국을 촬영지로 대체해야 했던 부조리를 비틀은 표현이다.

원작 ‘동조자’는 날카롭고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인 문장과 고도의 실험적인 문학 장치를 능숙하게 구사한 디아스포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는 2016년 첫 장편소설인 ‘동조자’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뉴욕타임스로부터 ‘문학에 빠져 있던 부분을 채우고,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는 평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비엣 작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가 자신의 소설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공언했다. ‘올드보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폭력성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사람들 역시 그를 속이는 구조,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갈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분석이었다.

원작에 언급된 문제의 그 달, 4월 드라마 공개를 결정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비엣 작가가 T.S. 엘리엇의 ‘황무지’ 속 문구를 인용해 책 속에 등장시킨 가장 잔인한 달 4월을 상기시키는 의미다. 1975년 4월30일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베트남인민군이 미국의 지원을 받던 남베트남 정부와의 20년 전쟁 끝에 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치민)은 함락되었다. 수년전 BBC가 공개한 미국 대사관 건물 지붕 위에서 줄을 지어 헬리콥터에 오르는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역사의 참상을 보여준다. 여전히 계속되는 참혹한 전쟁을 지켜보면서 광기 어린, 비극적 세계를 풍자적으로 그린 HBO 오리지널 ‘동조자’가 남길 묵직한 울림은 기대해도 좋다.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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