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자는 ‘작은 남자’가 아니다

2024-03-13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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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회가 색다른 안건 하나를 통과시켰다. 앞으로 60일 내에 소방국은 여성 소방대원 및 응급구조원들의 유니폼과 개인보호장비(PPE)를 여성의 신체조건에 맞게 만들라는 내용이었다.

이 뉴스를 들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여자 소방대원들은 남자 제복을 입고 일했다는 말인가? 안 믿기지만 그랬다는 사실이 이날 드러났다.

수퍼바이저 회의에 참석한 여성 파이어파이터들은 유니폼이 너무 크고 무겁고 몸에 맞지 않아서 화재현장에서 대처하기에 너무나 힘들다고 증언했다. 어떤 경우 사람 생명을 구하느라 분초를 다투는 상황인데도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추켜올리느라 행동이 굼떠진다는 것이다.


미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LA카운티 소방국에는 3,145명의 대원이 있다. 대다수가 백인남성이고, 여성은 82명(3.8%)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7년전 45명이던 데 비하면 거의 두배로 늘어난 것이다. 소방국은 미국에서도 굉장히 보수적인 집단이다. 그러니 여성대원이 꾸준히 늘어나는데도 제복 하나 이들에게 맞게 개선할 노력을 보이지 않아온 것이다.

그동안 여성들은 ‘축소된 남자’의 제복에 몸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제조업체들이 여자대원의 치수를 잰 후 그걸 남체의 패턴에 적용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소매와 바지 안쪽 가랑이 길이가 길고 흉곽은 크며, 여성의 엉덩이와 가슴의 곡선은 고려되지 않아 불편한 제복이 만들어진다. 관련업체들은 여성제복을 만들 몸체의 패턴이 없다든가, 여성에게 특화된 보호장비를 만들려면 소방국이 10만 달러어치를 대량 구매하라는 식으로 어깃장을 놓아왔다.

이건 불편이나 불평등의 문제이기에 앞서 안전의 문제다. 화재 진압에 나서는 소방대원은 평소 입는 유니폼 위에 노란색 방화복을 겹쳐 입어야한다. 유니폼과 방화복 모두 여성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 없으니 무거운 호스를 끌거나 사다리를 타거나 뛰거나 점프할 때 행동에 크나큰 제약을 받게 된다. 뜨거운 온도, 날아드는 불씨와 연기 속에서 일하는 상황에서 옷마저 무겁고 커서 남자보다 몇 배나 고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방대원만이 아니라 경찰, 군인, 인명구조대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다. 또 제복뿐 아니라 군화, 모자, 배낭, 권총띠, 방독면, 방탄복, 형광조끼 등의 장비에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다.

다행히 경찰에는 여성대원의 수가 비교적 많아서 약 40년 전부터 적합한 유니폼이 제공되어왔다. 2021년 현재 미국의 경찰인력은 82만4,824명. 이 가운데 여성이 14.2%를 차지한다. LAPD와 NYPD에는 18%가 넘고 시카고의 경우 24%에 달한다.

한편 미 육군은 여자생도의 입학이 허가된 지 35년 만인 2011년에, 해군은 2022년에야 최초로 여성에게 맞는 교복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그동안 여생도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짐작할 수 있겠다. 현직 미군 23만1,741명 가운데 여군은 17.3%, 공군에 가장 많고 해병대에 가장 적다.

소방대원, 경찰, 군인, 인명구조원은 모두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경우 목숨까지 바쳐 일하는 ‘소영웅’들이다. 전통적으로 남자의 세계였지만 여자들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이처럼 기본적인 장비에서부터 불평등이 야기되고 있다.


이 문제는 산업보건에서 사용되는 거의 모든 안전 데이터는 남자가 표준이고 기준이며, 여자는 예외, 특수, 혹은 혼란변수로 취급되어온 데서 비롯된다. 21세기 현대에도 ‘디폴트’ 표준인간은 몸무게 70kg의 남성이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Invisible Women)은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던 이 사실을 광범위한 통계자료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촘촘하게 보여준다.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설계된 이 세계가 어떻게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배제하는지를 기술과 노동, 의료, 도시계획, 경제, 정치, 재난상황 등의 수많은 영역에 걸쳐 낱낱이 폭로한다.

‘평균 남성’의 키, 몸무게, 근력에 맞게 설계된 도구와 장비는 당연히 여성에게는 너무 무겁거나 길고, 이런 장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손목, 팔, 어깨, 허리, 골반 등의 뼈와 관절에 피로골절이 오거나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다.

오랫동안 과학은 남체와 여체가 크기와 생식기능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으로 같다고 간주했다. 그래서 모든 교육과 훈련이 남성 표준에 의거해 이루어졌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이례적, 비정상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여자는 크기만 줄인 남자가 아니다. 근래 들어 학자들은 인체의 모든 세포와 조직과 장기는 물론이고 질병의 발병과 추이, 증상에서도 남녀차이를 발견하고 있다. 심장의 운동과 폐활량에도 남녀차이가 있고 심지어 심장마비의 전조 증상도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심장마비 사망률이 여자가 더 높은 이유는 남자 증상을 기준으로 판단해 조기진단 실패하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는 근육 분포와 골밀도가 다르다. 호르몬이 다르고 척추뼈의 간격도 다르고 신진대사 체계도 다르며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도 다르다. 부디 이같은 차이를 우리 모두가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찰하게 되기를 바란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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