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살았는데…” 하며 들려주었던 그 옛날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 마음에 아련한 추억으로 머물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아름다움을 심어주었다. 그 이야기들의 결론은 늘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대요”라고 끝나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였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이고, 삶은 해피 엔딩이 되어야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고, 또 계속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이야기이다. 배고프고, 아프고, 피곤하고, 외롭고, 무섭고, 걱정하고, 답답한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모아서 삶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재미있는 이야기, 어떤 사람은 슬픈 이야기, 어떤 사람은 무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서로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들려 주었을 때 함께 가슴을 조이며, 손바닥을 치며, 땅을 치며 그렇게 인생의 화로가에 모여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화로안에 고구마라도 있으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구마를 까서 서로 나누어 주며 캄캄한 밤일지라도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은 그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잘 났어도 겸손하고, 못났어도 부끄럽지 않고, 그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도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행복의 주인공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상생이다. 이야기속에 숨어 있는 상생의 원리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이야기에는 관심없고 이기기에만 관심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떨까? 서로를 살리기 보다는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삶의 이야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까,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질까, 더 높이 올라갈까 하는 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실수하면 감싸주고, 실패하면 격려하고, 잘하면 박수를 쳐야하는데 실수하면 기뻐하고, 실패하면 환영하고, 잘하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다.
스포츠 경기는 이겨야 하지만 그 어떤 팀이나 선수가 항상 잘 할 수는 없다. 잘 할 때는 칭찬해야 하고, 못할 때는 격려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이다. 그런데 무조건 이겼을 때만 칭찬하고 못할 때는 비난만 한다면 그 팀이나 선수의 결론은 뻔한 것이다. 그 팀이 해체되거나 그 선수는 운동을 그만 둘 것이다.
어느날 어린이 천구들이 목공소를 방문했다. 한 아이가 자기 손의 손목시계를 그만 톱밥 속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년들은 서로 자기가 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이 했다고 서로 서로 손가락질을 했다. 이야기를 말하고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남이 하는 말을 이기기 위해 서로 소리를 높였다.
이것을 본 목수가 빙그레 웃으며 전기톱을 끄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단다. 일단 무릎을 꿇고 귀를 마룻바닥에 대 보렴.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잘 들어봐?”
목공소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뚫고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 째깍”
이야기,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있는 어떤 상황이라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결론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상생이다. 그러나 이기기만 생각하면 걸국 서로를 죽이게 되는 살생의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린도전서9:25)
이야기가 있는 곳에는 웃음과 행복이 넘치는 상생이 있다. 이기기만 애쓰는 곳에는 싸움과 전쟁과 대립속에 서로 죽이는 살생만 남게 된다. 삶은 결국 이야기이냐? 이기기냐? 이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걷는 것이다. 썩지 않을 상생이냐? 썩을 살생이냐? 이것이 우리의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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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워싱턴 동산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