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눈먼 돈 앞의 양심

2024-01-16 (화)
크게 작게
마켓에서 장을 봤는데 직원이 실수로 돈을 덜 청구했다고 하자. 예를 들어 2달러짜리 빵을 여섯 개 집었는데 직원이 다섯 개로 계산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개가 덜 계산 되었다”며 2달러를 더 낼 건가, “직원 실수를 굳이 내가 왜~” 하며 눈 질끈 감고 넘어갈 건가. 많은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작은 양심의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의 실수로 이득을 본 금액이 2달러가 아니라 200달러라면 어떨까. “이게 웬 떡?” 하며 그냥 넘어갈 사람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게다가 문제의 돈이 주인이 따로 없는 돈, 눈먼 돈이라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양심의 갈등 없이 당연한 듯 챙기는 게 관행처럼 되어있다. 바로 정부 돈이다.

코비드 19 팬데믹으로 경제가 얼어붙었을 때 연방정부는 대대적으로 돈을 풀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급여보호프로그램(Paycheck Protection Program·PPP). 중소기업들이 경영난으로 직원들의 봉급을 깎거나 감원하는 일이 없도록 긴급 지원한 융자 프로그램이었다.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당시 PPP 융자건수는 총 1,150만 건. 총 8,000억 달러가 사용되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기업들은 너도나도 신청했다. 그 와중에 극심했던 건 사기청구와 남용. 긴급히 시행하느라 심사가 허술한 틈을 타서 사기꾼들이 타간 돈이 640억 달러에 달한다는 추정이다. 아울러 재정적으로 넉넉한 부자 기업들도 마구 돈을 타갔다. 그야말로 눈먼 돈이었다. 정부 돈을 물 퍼가듯 퍼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융자금을 갚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PPP는 애초에 변제되리라고 기대되지 않은 돈이었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한 탕감 절차를 밟으면 거의 바로 상환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99% 이상이 돈을 갚지 않았다.

그럼에도 돈을 갚은 특이한 케이스들이 있었다. 1,150만 건 중 7만 3,000건, 0.6%는 융자금을 변제했다. 안 갚는다고 뭐라 할 사람 없는 데 그들은 왜 굳이 돈을 갚았을까.

공영방송 NPR이 최근 이런 기업들을 조사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 돈을 갚았을까. PPP 전문가들에 따르면 탕감 받을 자격이 안 되거나 탕감 받을 경우 세무감사가 우려되는 기업들이 주로 빚을 갚았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온전히 도덕적 차원에서, 그게 옳은 일이니까, 빚을 갚은 양심적 기업들이 있었다. 매사추세츠, 웰슬리의 한 법률회사가 그런 케이스였다. 누가 봐도 바보인 이 로펌의 파트너, 밥 모릴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폭풍우가 심할 때 배에 탄 사람들에게 구명 기구를 나눠줬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걸 쓸 필요가 없었다면, 배가 항구로 돌아온 후 반납하는 게 당연하지요.”

모릴의 로펌(Gilmore Rees & Carlson)은 PPP를 통해 69만4,930달러를 융자받았다. 그리고는 “기다려보다가 필요하면 쓰자. 만약 쓰지 않게 되면 돌려주자”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큰 어려움 없이 팬데믹 기간을 넘길 수 있었다. 직원들 감원도 봉급삭감도 없었다. 그래서 모릴은 원금에 이자(5,600달러)를 더해 모두 갚았다. 그는 정부가 PPP 융자를 너무 쉽게 탕감해 버리는 데 대해 우려를 표한다.

“워싱턴에서는 돈이 돈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폭설 속 눈송이 같아요. 마구 퍼줘요. 그래도 아무도 상관 안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누가 갚아야 할 돈입니다. 우리 자식들이거나 우리 손주들이 갚아야 하겠지요.”

눈먼 돈과 마비된 양심이 공조해 만들어내는 것은 산더미 같은 국가부채. 현재 미국의 국가부채는 34조 달러이다. 눈먼 돈 앞에서 양심을 챙기는 바보들이 좀 많아질 수는 없을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