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계인의 ‘뇌 속 해마’에 살림을 차리다

2024-01-05 (금)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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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YT·WP, 2023 최고의 시집

▶ ‘날개 환상통’ 펴낸 김혜순 시인 “여성 목소리, 세계적 보편으로”

“영적이고, 기괴하고, 미래가 없는 상황 등 다양한 종류의 공포로 다가온다.”

“김혜순의 시는 번역을 통해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불멸의 영어로 날아오른다.”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2023년 최고의 시집 중 하나로 김혜순(68) 시인의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 사진)’을 꼽으며 각각 이렇게 평가했다.


“요즘 미국에서 시를 쓰면서 김 시인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시인인 척만 하는 셈”이라는 시인 포러스트 갠더의 말은 최근 한국 문학의 세계적 활약상에서 유독 뚜렷한 김 시인의 족적을 가늠케 한다.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2012·2019)과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2019), 스웨덴 시카다상(2021), 영국 왕립문학협회(RSL) 국제작가 선정(2022), 그리고 2023년 전미 도서비평가협회(NBCC) 번역서상 후보 선정까지. 1979년 등단 당시 한 평론가에게 “이걸 시라고 쓰고 앉았나. 혹시 심사위원의 애인 아닌가”라고 모욕당했던 1955년생 한국 여성 시인의 과장 없는 기록이다.

NYT와 WP의 2023년 최고의 시집에 실린 김 시인의 ‘어느 작은 시’ 마지막 구절은 제3세계의 여성 시인이 “15년 전 작품이 번역되자마자 북미와 유럽에서 추종자를 끌어모은”(뉴요커·2023년 7월) 까닭을 보여준다.

김 시인의 시는 한때 국내 문학계에서 ‘살림하고 연탄 가는 여자의 사소한 이야기’라는 멸시에 시달렸다. 등단 이래 여성과 소수자의 언어로 치열하게 위계에 맞선 그의 문학에 대한 백안시였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몸이 ‘시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시인은 여성성과 죽음, 신경통 등 사적인 고통뿐 아니라 세월호 등 사회적 참상으로 인한 타인과 경계 바깥의 고통까지 몸으로 사유하면서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을 쓴 황인찬 시인은 “그 수많은 고통을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탐구하는 것이 김 시인의 지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세상의 몸을 자기 몸으로, 그리고 시의 몸으로 산 그의 문학은 이제 “어떤 나라의 독자가 읽어도 이해와 공감이 가능한 고통이 됐다.”(이광호 문학평론가) 한국과 아시아라는 지역성의 한계를 넘어 ‘인간 보편의 정서’에 맞닿으면서 전 세계인의 뇌 속 “해마에 살림을 차리고” 존재를 각인시킨 셈이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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