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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癸卯年)을 보내며

2023-12-29 (금) 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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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간다. 벌써 다가오는 ‘푸른 용의 해’ 갑진년 인사말을 나눈다. 용감하고 강하며 권위와 풍요를 상징하는 용과 같은 한 해가 되라고. 푸른 용이 비상하는 연하장 카드를 받아 들고, 올해는 무슨 해였더라.. 가물가물해진 기억을 더듬어본다.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 다산과 풍요, 지혜를 상징하는 토끼처럼 풍성한 해가 되라고 연초에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인생은 기억의 덩어리다.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애쓰는 것도 누군가의 기억에 남겨지기 위해서일 게다. 기억되지 않는다는 건 어디에선가 불어와 사라지는 바람처럼 허무할 따름이다. 하지만, 기억은 축복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다. 2023년도 누구에겐 기억하고 싶은 축복의 해였기도 하겠지만, 많은 이들에겐 빨리 잊고 싶은 저주의 해일 수 있다. 작년 2월에 시작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고, 올 10월 초 시작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팔레스타인 종족 말살로 가고 있다.

상처의 시간은 빨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상처의 기억을 예술로 승화시켜 삶의 대박을 이룬 이들도 있다. 그 중 하나가 2023년 타임 매거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테일러 스위프트다. “대박났네!” 7월 초에 콜로라도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하는 소꿉동무를 LA에서 만났을 때였다. 친구는 함박 웃으며 말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덴버에서 이달 중순에 공연하는데 근처 숙박이 동이 나서 덴버 근방까지 숙박이 완판이란다. 우리도 그 덕에 비즈니스가 호황이야.”


월스트리트저널에선 ‘테일러노믹스: 테일러 스위프트가 오는 곳에 스위프티즈가 와 흥청망청 돈을 쓴다’는 기사를 내 Taylornomics라는 새로운 경제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23년 3월 애리조나에서 시작된 테일러 스위프트의 에라스(Eras) 투어는 11월 11일 브라질에서 올해 마지막 공연으로 총 24개 도시에서 60회 공연으로 총수익은 10억 달러 이상이었다 한다.

다섯 살, 추워지는 날씨, 큰 코트를 입고/ 당신의 웃음소리에, 당신을 바라보며 웃음 지어 달려가/ 호박밭과 트랙터를 지나, 이제 하늘은 금빛으로 물들고/ 당신의 다리를 껴안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잠들어// 가을에 나무가 왜 변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백설공주의 집이 가까운지 멀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당신과 함께한 게 최고의 날이었다는 건 알아//

열세 살, 친구들이 왜 그렇게 심술궂은지 모르겠어/ 집에 돌아와 울면, 당신은 나를 꼭 안아주고 열쇠를 집어/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차를 타고 가서/ 그들의 이름을 모두 잊을 때까지 이야기하고 윈도쇼핑을 해// 학교에서 이젠 누구랑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당신과 함께 차를 타고 웃고 있을 거야/ 언제쯤 괜찮아질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당신과 함께한 게 최고의 날이었다는 건 알아//

그녀가 열여덟 살 때 엄마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작사작곡한 “최고의 날 (The Best Day)”의 첫 두 구절이다. 십 대 때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고 울던 상처, 음악계에서 동료에게 배반당한 상처, 전적으로 의지했던 소속음반사에게 자신이 부른 모든 곡의 소유권을 뺏긴 상처, 삶의 이런저런 상처를 그녀는 경쾌한 음률의 노래들로 그 기억을 담아 내왔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개인이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 그 조각을 나누는가는 각 자의 몫이다.

존 F. 케네디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기리는 연설문에서 “한 국가는 그가 배출해낸 인물들뿐만 아니라, 기념하고 기억하는 이들에 의해 드러난다”고 했다. 역사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들에 의해 남겨지고, 개개인의 삶도 그렇다. 내 인생의 단 한 번뿐인 계묘년이 가고 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한 해는 사라지지만, 내 기억은 남아 한 땀 한 땀 형형색색의 자수로 남겨질 것이다.

<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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