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 저녁 허삼수, 우경윤 등 보안사 소속 수사관은 수도 경비 사령부 33 헌병대 소속 50여명과 함께 정승화 계엄사령관 사무실을 찾아왔다. 명목상 이유는 김재규 박정희 시해 사건 관련 조사를 위해 보안사로 가자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그를 제거하고 군을 장악려는 전두환의 음모였다.
정승화가 대통령의 재가가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총리 공관으로 연락하라고 지시하자 보안사 요원들은 무력으로 정승화를 제압해 연행해 가며 이 과정에서 계엄사 경호원들과 총격전이 벌어져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것이 12. 12 군사 반란의 시작이다.
뒤늦게 정승화 납치 사실을 알게 된 장태완 수도 경비 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펼쳤으나 역부족이었다. 군간의 통신은 보안사가 감청하고 있어 이들의 대응 상황이 고스란히 노출된데다 군내 최대 사조직인 하나회가 곳곳에 넓게 포진하고 있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오히려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는 하극상이 벌어졌다. 오죽하면 장태완 휘하에 있는 제30 경비단 단장실에 반란군 수뇌가 모여 반란을 지휘했겠는가. 제30 경비단은 하나회원이자 전두환 심복이었던 장세동이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특전사도 마찬가지였다. 수도권 특전사 주력 부대였던 제1, 3, 5 공수 특전 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모두 하나회 멤버로 1공수는 숨어다니던 노재현 국방장관을 국방부에서 체포하며 3공수는 특전 사령부를 급습, 정병주 사령관을 압송해간다. 이 과정에서 사령관을 지키려던 김오랑 비서실장이 사살된다. 13일 새벽 장태완 수경사령관까지 체포되면서 군사 반란은 사실상 마무리된다.
이 반란이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승화도 전두환이 위험 인물임을 알아채고 동해 경비 사령부로 발령낼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군 정보를 장악하고 있던 보안사에 알려지면서 거사를 결행하는 계기가 됐다.
정승화가 체포된 후에도 노재현 국방장관이 중심을 잡고 진압을 진두지휘했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총소리가 나자마자 도주하기에 바빴으며 결국 반란군에 잡힌 후 이들이 하자는대로 하고 말았다.
반란 와중에도 하나회 멤버가 아닌 윤흥기 준장이 이끄는 9공수 여단이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모든 공수부대가 서울에서 철군하자는 전두환의 간계에 빠져 서울 진입을 포기했다. 전두환은 물론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서울에 나머지 공수를 진입시켜 사태를 종결했다.
거기다 전두환의 절친 노태우는 자기 관할인 최전방 경비부대 9사단 29연대와 30연대 병력까지 서울로 빼돌려 힘을 보탰다. 이 공으로 노태우는 전두환의 후계자가 된다.
전두환의 군사 반란 진압은 애당초 어려웠을 것이다. 한쪽은 똘똘 뭉쳐 덤벼들고 다른 한쪽은 여기저기 흩어져 우와좌왕 하는 싸움의 결과는 불문가지다. 더군다나 한쪽은 지면 목숨이 날아가고 다른 쪽은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반란군 쪽은 치밀한 계획에 선제 급습의 잇점까지 있었다.
정승화는 갖은 고초를 겪다가 2등병으로 예편하는 수모를 당하지만 끝까지 저항했던 정병주 특전 사령관과 장태완 수도 경비 사령관의 후과는 더 비참했다. 정병주는 자식처럼 아끼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에게 모두 배신당하고 강제 예편된 후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자 회견을 한 후 1988년 10월 집을 나갔다 4개월 후 야산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됐다.
장태완은 강제 전역 당하자 이에 상심한 부친은 술로 날을 세우다 사망했고 외아들 장성호는 서울대 자연대 수석을 할 정도로 수재였으나 1982년 산 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끝까지 상관을 지키다 군대 친구였던 박종규 총에 맞아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는 그 충격으로 눈이 먼채 남편 명예 회복을 위해 힘쓰다 1991년 추락사했다. 이들 의문의 죽음은 아직도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2. 12 군사 반란은 아무런 명분도 없이 전두환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같이 나라를 지키자고 맹세한 동료 군인들을 죽였다는 점만으로도 죄질이 나쁜데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광주 학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20세기 후반 한국 최악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요즘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든 ‘서울의 봄’이 화제다. 지난 22일 개봉한 이 영화는 이미 누적 관객 640만을 넘었으며 1,000만 돌파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국방 장관을 지나치게 희화화하고 수경사령관을 미화한 감은 있으나 당시 상황을 충실하고도 박진감있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아 마땅하다. 현대사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가 한국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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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