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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키다

2023-12-07 (목) 남현실 락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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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서 전주에 살았다. 그때는 생활이 몹시 어려왔기에 가끔 서울 사는 오빠 집을 찾아가 어머니와 오빠가 올케 언니 몰래 찔러 주는 용돈을 받아다 쓰곤했다.
결혼후 이듬해 제왕절개로 첫 아이를 출산한 나는 병원비가 모자라 퇴원을 못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올케 언니에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 전화를 했다. 15만원만 빌려달라고. 그러나 올케 언니는 돈 만원도 못 빌려준다며 매몰차게 거절을 하였다. 그 일은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올케에 대한 격한 감정의 편지를 어머니께 보낸 후 둘째를 낳기까지 친정과 왕래를 끊었다.

3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어린 남매를 데리고 어머니를 뵈러갔다. 오빠집 골목길에 들어서자 어머니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이들을 안아보신 후 돈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어머니 모신다고 애쓰신다며 네 올케에게 주라고 하셨다. 또 단호히 한 말씀을 더 하셨다. “앞으로 못 살면 친정에 오지 말아라. 어렵게 살면서 친정에 오면 올케들한테 무시당한다.”
그 후 어머니는 나에게 집안의 대소사를 알리지 않으셨다.
가끔 전주에 오셨다가도 내가 보낸 것처럼 집 근처 시장에서 선물을 사가지고 집으로 가셨다.


남편이 이스라엘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생활의 어려움이 정점에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자식이면서도 한푼의 장례비조차 내지 못했다. 돌아가신 다음날 어머니 옷장 안을 정리하다가 가방이 있어 무심코 열어보니 만원짜리 지폐들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돈을 훔쳐 화장실 가서 세어보니 30만원이었다.
그 돈을 남편이 주었다며 장례비로 내놓고 장례식 내내 가슴으로 통곡을 했다.
1996년 유학길에 오른 남편을 따라 고국을 떠나기 전 나는 어머니 산소에 들러 약속을 했다. “어머니, 미국에 가서 애들 잘 키우고 저희가 고국에 돌아올 때는 남편의 이름으로 장례비를 다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23년이 흘렀다.
오빠들 연세가 팔십이 넘어가자 더 미룰 수가 없었다. 2018년 고국을 찾았다. 부모님 자손들 수십명이 선산에 모였다.
“어머니! 약속을 지키러 제가 이제 왔습니다.” 헌화 할 때는 어려웠던 지난날이 떠올라 눈물이 먼저 쏟아졌다. 감사 예배를 드린 후에 내가 말할 순서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 돈을 훔쳐서 장례비로 낸 도둑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런 후에 아버지 없이 자랄 때 막내인 나를 보살펴준 형제들 부부에게 한분 한분 깊은 감사를 드렸다. 먼저 조카들 가정마다 미국에서 준비한 선물을 주고 형제들에게는 남편이 이제사 장례비 가져왔노라고 달러가 든 금일봉을 손에 쥐어드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셨던 올케 언니에게는 지난날 딸노릇 못한 미안함을 담아 특별 금일봉을 드렸다. 그 날 부모님 산소 앞에 모인 수십명의 친정 식구들이 우리 부부와 사진들을 찍으며 치는 박수와 환호성, 눈물은 8월의 태양보다 더 뜨거웠다. 그리고 남편은 그 날 처음으로 처가 친인척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지난날 우리 형제들은 죽을 것 같은 고난과 시련, 힘든 세월을 살았다. 그러나 칠남매 자식들이 물고 오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는 앞으로 너희들은 잘될 거야라는 말로 축복해주셨고, 무엇보다 그분의 칭찬과 격려의 언어가 있었기에 우리 형제들은 무지막지하게 때리며 쳐들어 오는 고난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 형제들간에게 헐뜯거나 다툼 한번 없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우애를 나누며 살고 있다.

<남현실 락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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