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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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쟁이 엄마

2023-12-03 (일) 김지나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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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베지 못하고 자는 잠버릇 때문에 소파 바닥에 얼굴을 대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따뜻하고 포근한 블랭킷 감촉이 꽤 푸근했다.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본 창문에 걸려 있는 붉은 해는 아직 저 너머를 넘어가지 못한 채 검은 나뭇가지에 멈춰 섰다. 붉으스레한 태양 빛이 저 너머에 머뭇거리다 보니 나뭇잎을 어디론가 날려버린 키 큰 나무들은 검디검은 마른 장작이 되어 검은 땅에 붙잡혀 서 있는 듯 안쓰럽다. 불타며 사그라지는 해를 잠시라도 더 붙잡고 싶은 듯한 검은 나무들의 흔들림은 나만의 착각일까?

나 또한 붉게 물든 해가 조금만 더 머물기를 기다리는 듯 작은 눈동자를 흐릿하게 만든다. 검붉은 빛 위로 진분홍 색감이 스펙트럼처럼 점점 높게 물들고 있다. 검은 나무 키가 점점 높아진다. 내 눈은 나무의 그 끝에 초점을 맞추느라 의식은 조금 선명해진다. 아이들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강아지와 함께하는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조금 더 누워있어도 된다는 신호다. 그런데 이번엔 검은 나무가 아닌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큰아이와 동행 온 고양이다. 너의 자리가 여기에도 있었구나. 누운 소파에서 본 고양이의 낮잠 자리가 나와 같은 높이의 식탁 의자 위였는지 몰랐네. 나와 같은 시간의 흐름을 저 아이도 함께했구나. 고양이와 눈을 맞추다 다시 창문을 보니 어라? 붉은 기운은 사라지고 창문의 반이 검은빛으로 가득 차버려 검은 나무의 끝머리만 간신히 보인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가장 빛나는 작은 반짝임이 검은 나무 머리끝에 살짝 내비쳤다. 그 머리 위로 흰빛이 선명해서 다시 낮으로 귀환 될 정도의 착각을 잠깐 일으켰다.


다시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난다. 그러는 사이에 해는 훌떡 기어이 검은 나무를 가려버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넘어 가버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하얀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뒤덮어 버리는 천사의 마술봉이라면 해가 넘어간 어둠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덮어버리는 악마의 입김이다. 검은 두려움이 엄습하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나보다 먼저 검은 눈동자가 천 의자를 긁으며 기지개를 켠다. 나는 노란 불을 켠다. 식탁 위에는 시장 본 온갖 식품들이 한가득 올려져 있다. 생각해 보니 저 많은 것들을 정리하지도 않고 그대로 얼굴을 소파에 뉘어버렸구나. 둘째 아이가 먹고 싶다던 초밥도 냉장고에 넣지 않았고 생고기도 산더미처럼 샀는데 냉장고에 넣지 않았다니, 냉동해야 하는 것들도 방치했고, 이를 어쩌나!

무거웠던 다리와 손이 언제 그랬나 싶게 빠르게 움직인다. 내일이 바로 추수감사절이라는 걸 상기해본다. 미국에 오고 처음엔 추석이나 설날 같은 한국의 명절을 아이의 교육 차원에서 챙겼지만, 학교나 회사의 일정을 따라야 하는 한인들은 온 가족이 모인다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다. 점점 한국의 명절이 무의미하게 되면서 추수감사절이 일 년 중의 최대 큰 명절이 되어버렸다.

이번 해는 집이 멀어 가지 못하는 아이들 친구 몇 명과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향수병이 있는 남편 회사 직원 몇 명 그리고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갓 결혼한 조카 부부가 오기로 되었다. 특히 미국 땅에서 처음 친척으로 합석하는 조카며느리가 귀한 왕자님을 임신해서 깜짝 베이비샤워 파티를 열어 주기로 계획을 한지라 더욱 행복하고 의미 있는 해가 되리라 생각된다.

서둘러야 한다. 생선, 과일, 채소는 냉장고와 딤채에 분산해서 저장하고 약식을 할 찹쌀 한 되를 씻어 물에 불려놓고 고기는 물에 담가 핏불을 뺀다. 곧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컹컹 짖는 소리가 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등갈비를 넣고 푹 끓인 김치찌개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이들과 수다를 떨며 내일 음식을 위한 밑 작업을 해 놓으면 오늘의 일을 마칠 것이다.

그러다 문득 행복이라는 단어와 마주한다. 조금 전 실눈을 떴을 때 붉은 너울에 비친 숯처럼 검은 나무의 스산함에 몸서리쳤고 붉은 해가 훌떡 넘어가면서 검은 그림자가 온 세상을 뒤덮어버려 영혼을 집어삼킬까 두려웠었다. 창문 밖의 어둠은 그대로인데 아이들을 기다리며 저녁을 짓고 있는 창문 안의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 올리고 있다. 존재만으로 행복을 주는 가족은 행복의 근원임에 틀림이 없나 보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갱년기를 겪고 있고 ‘MBTI 성격 유형 검사’ 결과 또한 때에 따라 내향적, 외향적 성향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오류를 몸소 실천하고 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나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도 달라질 변덕쟁이 성격의 소유자다. 가족은 그런 나를 ‘엄마'라 부르며 존중해 주고, 따뜻하게 ‘아내'라 불러 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 나는 참 행복한 변덕쟁이 엄마다.

<김지나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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