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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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위 얼굴

2023-11-24 (금) 조광렬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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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은 서재필(Philip Jaisohn)이 창립한 ‘독립회’가 서울 서대문구에 세운 ‘독립문’ 기공식 127년째 되는 날이다. 서재필은 최초의 한국계 미 시민권자, 최초의 한국계 미국의사다.

그는 독립회 고문 재직시 배재학당 강사로 이승만의 스승이었고, 한국 근대화운동과 신문화운동의 선구자로 미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은 이 땅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큰 바위 얼굴’이다.

나는 오늘 미주동포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이름 뒤에 붙여진 다양한 타이틀과 이력이나 업적에 대한 소개는 모두 생략하고, 대신 그에 대해 쏟아낸 소인배들의 비난과 부정적 평가 속에서 더욱 빛나는 그의 진면목을 조명하고자 한다.


▲ “그는 스스로 외신(外臣)이라 칭하고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한 뒤에 고종 앞에서도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는 비난 - 미개한 조선의 신분제 타파, 인민 평등권 확립 등의 개혁 혁명에 실패한 역적(?)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그의 온 가족을 몰살시킨 조선에 미국인 신분으로 돌아와서 미국식으로 인사를 한 것은 자연스런 태도요, 초심을 잃지 않은 애국적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대한제국 정부에서 추방당하면서 그는 2만4,400원이라는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해 받아 출국했기에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 - 고용계약을 위반한 쪽은 정부였기에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더구나 훗날 3.1 운동 직후 그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부인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7만6,000달러를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던 그를 생각하면 오히려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이런 희생적 모습에 감동한 안창호는 이때부터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땅에 묻혔으며, 미국시민으로 살다가 죽었기에 국립묘지로 이장은 불가” - 그렇다면 그가 건국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이승만에게 양보한 것도 같은 잣대로 죽은 사람에게 비난의 훈계를 할 수 있겠는가?

자서전에서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 때문이었다. (중략)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대 사람이었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우리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다시 귀국하였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가 6.25 동란 때 암으로 투병 중 88세를 일기로 휴전을 못보고 1.4 후퇴 때 세상을 떠났다.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이 지금 큰 울림으로 나의 귓전을 때리고 있다. 그로부터 다시 75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서재필 같은 ‘큰 바위 얼굴’이 그립다.

<조광렬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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