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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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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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왕별희(覇王別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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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의 경극(京劇) 사랑은 남다르다고 한다. 중국에는 경극만 방영하는 ‘CC-TV 채널11’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요즘의 우리나라로 말하면 K-Pop 이나 트로트 붐에 해당한다고나할까. 한국에 판소리가 있다면 중국에는 경극이 있다. 노래가 강조된 판소리와는 달리, 경극은 노래뿐아니라 배우들의 무술, 연기도 중요시 되며 특히 경극에서의 화장은 ‘검보’라고도 불리우며 배우들이 직접 자신의 얼굴에 붉은 색, 검은 색, 흰 색 등의 화장을 하여 극 속의 배우들의 성격을 구분한다고 한다.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를 보다보면 배우들의 화려한 분장에 초점이 모아지곤 한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이벽화(릴리안 리)의 소설 속에서도 거울 속의 청뎨이(장국영)와 현실 속의 청뎨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삶과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붉은 색과 흰색 등 요란하게 ‘검보’를 하면서 주인공 장국영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자칫 가면 속의 인생의 모습… 그 본질적인 비극을 보는 것만 같아 섬뜻하기조차 하다.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란 배우는 상대역 남자배우를 사랑하는 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결국 현실과의 괴리감에 괴로워하다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영화가 예언이 된 듯 장국영의 생애도 우울증으로 자살, 우리에게 충격을 준 바 있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어딘지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의 비애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가 세상에 나온지도 벌써 30여년이 지났다.(올 한해 동안 미국등지에서 ‘패왕별희’에 대한 각종 시사회가 열렸고 한국에서는 지난 4월 ‘패왕별희’ 30주년 기념 171분짜리 오리지널 영화가 재 개봉되어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1994년 ‘패왕별희’가 미국에서 상영되고 있을 당시, 같은 방 N 편집기자는 “한국에서는 왜 이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지?”하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N기자의 극찬을 뒤로 하고 이 작품을 보게 되었는데 상업영화의 틀을 벗어난, 예술 영화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점, 반면 경극(베이징 오페라)을 주제로한 영화로서, 영화 속에서 경극이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점 등은 아쉬웠지만 장국영, 공리, 갈우같은 배우들의 연기 하나만은 극찬 받을 만했다.


주인공들의 동성애 성향을 리얼하게 다룬 이 작품은 다소 보수적이었던 중국 본토에서조차 동성애 문제보다는 문화혁명을 다뤘다 하여 한동안 금지작품으로 지정됐을 뿐 현재에 와서는 최고의 작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도 다소 충격이지만, 아무튼 여러면에서 특별했던 이 영화는 성으로 대체된 예술의 모습, 예술로 대체된 성… 그 공허한 현대인의 현주소를 엿보게 하기도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제를 감독한 장예모와 중국의 5대 감독으로 꼽히는 천카이거는 같은 시기(1993년)에 영화를 출품(갈우와 공리가 2작품에 동시에 출연) 하여 천카이거는 ‘패왕별희’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장예모 감독은 ‘인생’에서 갈우가 남우주연상을 받는 쾌거를 올렸다. 공리와
삼각관계였던 두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도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당시 장예모와 동거 중이던 공리는 ‘패왕별희’ 이후 천카이거와도 우정을 쌓아 장예모와 헤어진 뒤 천카이거의 연인이 되었다는 후문도 있다. 아무튼 이 영화는 여러 측면에서 평범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특히 주인공 장국영이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했다.

- 한 번 웃으면 온 세상이 봄이요, 한 번 흐느끼면 만고에 수심이 가득하니… 마치 당신을 노래한 것 같군- <극 중 원대인이 청뎨이에게>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중국에도 ‘인생은 연극같고 연극은 인생같다’는 말이 있다. 중국인들이 경극에 열광하는 것은 연극을 통해 인생을 풍자하고 희노애락을 함께하고자하는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주로 상류층들이 즐기는 서양의 오페라와는 달리 경극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민에서부터 상류층 모두가 즐기는 예술로서, 중국내에서 공연되는 경극의 수만해도 수천개가 넘는다고 하니 ‘경극’은 우리같은 외부인(?)들이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 느낌과 감상을 적을 뿐이지만 화려한 분장과 요란한 춤, 특이한 노래 등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의 무형문화재… 경극만큼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중국의 또다른 일면을 엿 볼 수 있는 예술장르도 없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패왕별희’ 30주년을 맞아 2019년에 창극으로 만들어진 ‘패왕별희’가 11월14일 해오름극장에서 다시 막을 올려 ‘패왕별희’ 팬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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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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