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일에 관심을 두며 살고 있는가? 이웃이나 세상사에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의 줄임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대를 무관심의 시대 혹은 자기 관심사 이외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편향적 관심의 시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 기후재앙, 하와이 산불 소식, 모로코 지진 재해, 2만여 명이 사망한 리비아의 홍수 재해 등등 안타까운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또한 고립-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범죄, 안타까운 극단적 선택들, 고독사 소식 등등 늘 안타깝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만난다.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가장 흔한 반응은 못 본 체하는 무관심이다. 관심을 가져보아야 별 소용이 없다고 느낄 때, 내게 별 이로운 점이 없거나 불이익이 예상될 때 생각될 때 무관심해진다. 무관심은 상대를 이웃이 아닌 ‘남’이라 보는데서 나온다. 자기중심성으로 닫힌 이기적 마음이다. 따뜻함이 없는 무정한 사람의 마음이다. 관계의 단절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종교인들은 사회 문제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순수한 신앙이나 고매한 영성인양 은근 자랑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공동체나 사회 문제 혹은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람들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비난하기도 한다.
사회적 무관심은 개인의 성숙이나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를 더 힘들게 한다. 사회의 무관심으로, 해결되어야할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 막히게 되면 가장 불이익을 당하는 계층은 빈곤자요, 소수자요, 사회적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악한 인간보다 두려워해야할 것은 착한 사람들의 무관심’이라는 영화 대사가 생각난다. 다원화된 사회, 다양화된 사회,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관심은 현대인의 최소한의 의무다.
물론 지나친 사적 관심이나 불순한 의도의 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관심은 상대방의 처지를 내 안으로 들여와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마음이다. 저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바라보는 마음이다. 진정한 관심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때, 상대방을 이웃이나 타자로 대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성경은 형제자매와 이웃에 관심을 두며 살고 있는지 묻는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 4:9) 예수께서는 강도 만난 사람을 가엾게 여겨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하여 이웃에 관심 있는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할 선한 삶이라 말씀한다. 흥부전도 다리 다친 제비를 고쳐준 흥부를 통하여 지극히 작은 존재인 미물이나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보이는 삶이 선한 삶이요, 복 받는 삶임을 말하고 있다.
관심은 사람다움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건강한 관심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세상을 따듯하고 밝게 한다.
사회적 관심은 또한 세상을 바꾸어 가는 데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회적 관심은 개인의 행복에도 영향을 준다. 정신의학자요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한 사람의 사회적 관심은 그 사람의 삶에 의미와 행복을 준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심 한 채,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며 사는 사람은 결국 무상(無常)에서 오는 실존적 공허와 허무의 자리에 머문다.
관심을 갖자. 관심은 나와 이웃과 세상을, 나와 자연을 그리고 나와 하늘(하느님)을 이어준다. 건강하고 따듯한 관심은 내면의 행복과 우리의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나는 어떤 일에 관심을 두며 살고 있는가? 관심은 사람다움을 지향하는 현대인의 최소한의 의무다. 관심이 곧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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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