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연구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을 허하라
2023-10-26 (목)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현재 미중 전략 경쟁은 과학기술의 판도에 따라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과학기술 전선의 최첨병인 미국도 중국의 폭발적 과학기술 부상을 의식해 연구개발(R&D) 확대, 인력의 유치와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중국도 미국의 기술 디커플링이라는 벽에 막혀 자립화를 선택했지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인력과 자본 그리고 시장을 최적화해 게임체인저의 우회로를 찾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극한 사고’를 요구하면서 ‘국가의 명운은 과학기술에 달렸다’고 독려하고 있다. 특히 ‘두 손으로 목을 조른다’는 의미를 지닌 차보쯔(chokehold)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기초연구 강화와 원천형 혁신 인프라 구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성패는 정책 의지와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에 달렸다. 중국 정부는 심각한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최근 10년간 과학기술 예산을 매년 두 자릿수 늘렸다. 2019년 2조 위안(약 370조 원)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3조 위안(약 554조 원)에 달했다. 기초과학 분야에만 우리나라 전체 R&D 규모에 달하는 1951억 위안(약 36조 원)을 지원했다. 더 나아가 국가안보의 컨트롤타워를 중심으로 전략기술 거버넌스를 구축해 전 지역, 전 영역에서의 R&D 인프라가 고루 스며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최근 ‘치밍(Qiming)’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가동해 해외 전문 인력 유치와 양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약 5억 5000만∼9억 원에 달하는 보수, 주택·복지·교육에 대한 파격적 대우를 내걸었다. 지난달 27일 발표한 ‘신진 과학자 양성 및 사용 강화 조치’에 따르면 신진 과학자의 독립적인 연구 환경을 보장하고 국가 주요 연구 과제의 책임자 중 절반 이상을 40세 이하 신진 과학자에게 맡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해 중국 각지의 대학 입시 이과 수석 합격생들은 대부분 칭화대 정보과학·전기전자공학 등으로 속속 몰려들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는 과학기술계 일부의 예산 나눠 먹기 관행과 ‘이권 카르텔’의 폐해를 들어 내년도 전체 R&D 예산을 전년 대비 약 16% 삭감한 21조 5000억 원으로 책정했다. 이러한 단견은 과학기술 연구 생태계를 무너뜨려 중요한 장기 연구 대신 단기적 성과를 좇게 하고 학문 후속 세대들을 연구실 밖으로 밀어내며, 항상적 연구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기업들의 부담도 가중시킬 것이다. 더구나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우리의 기초과학 현실을 고려하면 국제적 협동 연구가 필수적인데 예산 삭감은 기술과 정보 유출의 위험에 더욱 노출되게 할 것이다. 우리 과학기술계에 이권 카르텔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예산 삭감을 무기로 과학기술계를 수술대에 눕혀 놓는다면 연구 의욕을 꺾고 책임자들은 관료의 눈치만 보게 될 것이다.
몇 해 전 중국과학원의 저우샹위 원사가 기초과학 연구가 ‘유용성’만 중시하고 ‘쓰지 못하는 것의 무용성(無用之用)’을 경시하면 과학 강국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자 중국 정부가 즉각 과학기술 정책을 변화시켰다. 우리나라 굴지의 화장품 회사도 과학재단을 설립하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사고하며 연구의 영역을 무궁무진하게 확장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지원한다”고 한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우선 지원하되 개입하지 않아야 하고 예산을 무기로 단기 성과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실패를 용인하고 북돋우는 인내가 절실하다. 예산을 무기로 들고 과학기술계를 순화시키기 전에 청년들이 도전 정신을 버리고 의과대학으로 몰려드는 비정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국가의 미래는 과학기술에 달려 있다. 이것은 근대화의 논리가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의 거대한 파고를 넘고 글로벌 중추 국가로 가기 위한 길이다. 한미 동맹이 아무리 강화돼도 우리의 차보쯔 기술이 없는 한 미국이 한국을 보는 눈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중국에 대한 당당한 외교도 과학기술의 사람·기술·자본이 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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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