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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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없는 대화

2023-10-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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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지긋한 1세들에게는 오래 전 한국에서 무작정 친구를 찾아가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전화가 귀할 때니 미리 연락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고, 그저 친구가 보고 싶어 찾아가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때로는 도시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보면 친구가 활짝 웃으며 맞기도 하고, 허탕을 치기도 했다. 친구가 없으면 그냥 묵묵히 돌아올 뿐, 시간낭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수십년 전 삶은 느리고 우리는 그 속도로 편안했다.

전화가 집집마다 생기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친구든 친척이든 무작정 찾아가는 일은 없어졌다. 상대방이 집에 있는지 전화로 확인하고 가니 허탕 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확인절차가 상례가 되면서 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전화 없이 불쑥 찾아가는 건 너무도 무례한 일이 되었다. 테크놀로지가 끼어들면서 푸근했던 인심이 조금씩 야박해지기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의 방편이 다양해진 지금은 또 다른 전화 에티켓이 등장했다. 사전에 알리지 않은 방문은 말할 것도 없고 전화를 거는 것도 실례가 된다. 전화를 걸기 전에 텍스트 메시지로 통화 가능한지 먼저 알아보는 게 순서라고 에티켓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울러 절대로 음성메시지는 남기지 말라고 조언한다. 음성메시지를 챙겨 듣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텍스트 메시지, 메시지 앱, 이메일 등 직접 통화하지 않고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도구들이 생기면서 목소리로 대화하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젊은 세대는 말보다 문자로 이야기하는 걸 편해한지 오래다.

젊은 세대의 텍스트 선호추세를 모르다 보면 나이든 세대는 괜히 기분이 언짢아 지기도 한다. 성인 자녀들에게 전화하면 바로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로 답하는 게 영 못마땅하다는 노년층이 많다. “지금 바쁜데, 무슨 일 있으세요?”라는 문자를 받으면 왠지 성의 없어 보이고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반면 젊은 층은 텍스팅이 습관처럼 되었다. 회의 중이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전화통화보다 텍스트가 편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전통적 전화통화는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글로벌 여론조사 기구인 유거브(YouGov)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2%는 친구나 가족과 텍스트 메시지나 메시지 앱으로 대화하는 걸 선호한다. 전화를 걸거나 받으며 음성통화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42% 정도. 아울러 젊은 세대가 피하는 것은 음성 메시지이다. 모르는 사람이 음성메시지를 남길 경우 이를 듣는다는 사람은 31%에 불과하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바뀐 것이다. 이런 변화에는 텍스트의 편리함이 크게 작용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병행할 수 있고, 시간을 따로 내지 않고도 즉시 답할 수 있는 등이 텍스트의 이점이다. 음성메시지를 남기려면 최소한의 격식을 차려야 하는 데 문자 메시지는 그런 부담이 없다는 것도 편한 점이다. 전할 내용을 직설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기 좋은 수단이다.

목소리로 통화할 것인가, 문자로 의사소통 할 것인가는 상대방과의 관계, 주고받을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감정이 중요한 대화는 목소리에 담아야 제대로 전달된다. 내용이 민감하고 복잡할 경우도 말로 설명하는 게 효과적이다.

이래저래 목소리 듣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요즘처럼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다양한 시대에 외로운 사람은 왜 점점 늘어나는가. 얼굴 없고 목소리 없는 대화들 때문이다. 사람은 마주 보고 대화 나누며 상대방을 온전히 느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텍스트가 아무리 편해도 부모형제, 가까운 친구들과는 목소리로 통화해야 우리 모두 외로움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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