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시낭송하기 좋은 계절이다. 좋은 시를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가을 색으로 물든다. 누군가의 낭송을 듣는 것도 그러하다. 눈감고 귀를 열면 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시인의 세상이 온몸에 가득 차올라 풍요로운 가을이 된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의 시낭송을 들었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그분은 코비드로 발이 묶였던 2021년, 코위너 문화위원회가 주관한 ‘제1회 애송시 암송대회’ 참가자였다. 대면 행사를 할 수 없었던 시기여서 뭔가 할 게 없을까 의논하던 중,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시낭송 대회나 디카시 대회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언했다. 줌으로 하니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에 동의하여 시낭송대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일을 분담하였다.
공지를 올리자 세계각국에서 이메일이 왔다. 아무도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중국에서 등록한 분이 가장 많았다. 그분이 그중 한 분이었다. 프로 낭송가도 아니고 말투나 억양이 영락없이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북한 사람과 비슷해서 자기소개를 할 때 낭송에 적합한 목소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낭송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눈물이 핑 돌았다. 편견이었다. 그분 목소리가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와 그렇게 잘 맞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발음, 의미 전달력, 시의 이해력, 무대 매너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 없는 감동적인 무대였다.
그분을 다시 만난 건 두 번째 행사 때였다. 상품으로 받은 내 시집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읽고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기억해주는 마음이나 역시 고마웠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문학으로 하나 되고 누군가 낭송해준 시 한편이 역병으로 인해 닫혔던 마음을 열어줄 뿐 아니라, 인연이 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제577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LA한국문화원과 세종학당이 마련한 ‘2023 미주 온라인 시낭송대회’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다. 1차 심사를 부탁했을 때,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눈에 밟혔다. 2차 심사를 맡으면 1차에서 올라온 사람만 심사하면 되니 부담이 적을 것 같았다. 동영상을 보고 채점표를 작성해 보내려면 시간이 빠듯해서 수강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강을 하였다. 동영상을 보면서 부담은 이내 행복으로 바뀌었다. 1차 심사를 맡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2차 심사를 맡았다면 참가자 전원의 시를 만나는 행운은 절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참가자의 대부분은 외국인이었다. 한국인도 있었지만, 영어권이어서 한국어 구사가 유창하진 않았다. 외국인들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 대표 시인들의 시를 낭송하는데, 얼마나 잘 하던지 심장이 뛰었다. 크게 웃기도 했다. 한국 사람에게도 어려운 시를 읽고 이해하고 소화하여 자기만의 소리로 낭송하는데, 진심으로 감동했다.
헤드폰을 끼고 반복해들었다. 배경 음악, 몸동작, 시선, 호흡, 소도구, 의상… 그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보았다. 상과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그들의 무대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한류의 물결을 타고 K-Drama, K-Pop, K-Food 등에 이어 이젠 K-문학도 함께 부상하는 것 같아 문인의 한 사람으로 기뻤다. 참가가 중 한 사람이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한국시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행사였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행사 참여에 그치지 말고 계속해서 한국시를 읽고 한국문화를 사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국인의 낭송에 심히 가슴이 떨렸던 백석의 시를 읊어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가 있어 나의 가을은 행복할 것이다. 누군가의 가을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
박인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