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오페라의 2023-24시즌 개막작인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Don Giovanni)는 여자를 너무 밝히는 호색한이 온갖 범죄를 저지르다가 종국에는 지옥 불에 떨어지는 이야기다. 치마만 둘렀으면 모두 ‘작업’에 들어갔던 조반니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시종 레포렐로는 유명한 아리아 ‘카탈로그 송’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주인님이 사랑한 미인들의 명단입니다요.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에선 100명, 터키는 91명, 스페인에서는 1,000명 하고도 세 명이나 되죠. 시골아가씨, 하녀, 도시처녀, 백작부인, 남작 딸, 후작부인, 공주님까지 모든 계급, 나이, 사이즈를 총망라합니다. 금발여인은 아름답다고, 갈색머리는 정숙하다고 찬양하죠. 겨울엔 살찐 여자 여름엔 마른 여자를 찾고, 키가 큰 여인은 위엄 있다고 작은 여인은 귀엽다고 좋아합니다. 나이 많은 여인을 유혹하는 건 순전히 숫자를 늘리는 재미 때문이고, 우리 주인이 진짜 열중하는 상대는 어린 숫처녀랍니다. 돈과 외모는 따지지 않아요. 오로지 치마만 두르면 그의 먹이가 되죠.”
사기, 협잡, 폭행, 살인을 저지르며 2,065명 여성들을 농락하고 다닌 돈 조반니가 2막에서 늘어놓는 궤변은 이렇다. “나에게 여자는 공기와 음식처럼 소중한 존재, 내가 여자들을 계속 배신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지. 한 여자만 사랑하는 건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 잔인한 짓이야. 감정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그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인데 나같은 솔직함을 사람들은 이해 못하고 욕을 한다네.”
이런 인간이 실존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인류와 여성들에게 얼마나 다행인가. 돈 조반니는 14세기 스페인의 전설적 난봉꾼 돈 후안(Don Juan)의 이탈리아 버전이다. 티르소 데 몰리나가 쓴 책 ‘세비야의 사기꾼’(1630)에 처음 나왔는데 허구 속 바람둥이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그를 어찌나 부러워했는지 몰리에르의 희곡과 바이런의 서사시를 비롯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계속 나왔다. 그러나 돈 조반니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 작품 덕분에 불멸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는 작곡하는 동안 이런 악인을 주인공으로 삼아도 되는 것인지, 이처럼 선정적인 내용의 오페라를 만들어도 되는지 많이 갈등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작곡을 마친 이유는 결국 나쁜 놈이 벌을 받고 죽는다는 결말이 위안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럼 ‘돈 조반니’의 대본은 누가 썼는가, 이탈리아의 시인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의 작품이다. 탁월한 극작가였던 그는 11명의 작곡가와 28개의 오페라 대본을 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모차르트와 함께 작업한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그리고 ‘돈 조반니’다. 이 3개의 오페라를 묶어서 ‘다 폰테 3부작’이라고 부르는데 오페라 세계에서 대본작가의 이름을 붙인 거의 유일한 사례라 하겠다. 그만큼 탁월하다는 뜻으로, 그의 대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모두 개성이 뚜렷한데다 풍자와 해학이 넘치고 유머가 뛰어나 큰 인기를 끌었다. 모차르트의 재기발랄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훌륭한 대본을 만나 명작 오페라로 탄생한 배경이다.
그런데 이 다 폰테라는 사람은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다. 베니스 출신의 유대인인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24세 때 사제가 되었는데 술과 여자, 도박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가톨릭 사제단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이때 곤경에 빠진 그를 도와준 것이 당시 베네치아 사교계의 스타였던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Giacomo Casanova). 다 폰테는 그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진출하여 오페라 극작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카사노바가 누군가. 그 역시 15세에 성직에 입문했으나 여성 신자들을 유혹하는 일탈행위가 심해서 교회에서 쫓겨났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호색한에 노름꾼인 방탕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화려한 언변과 허풍, 쾌락에 탐닉하는 자유연애의 신봉자 카사노바를 다 폰테는 자신의 멘토로 모셨고, 그의 권유에 따라 전설적인 돈 후안 이야기를 오페라로 쓴 것이 ‘돈 조반니’였다.
그러니까 이 오페라에는 자신과 카사노바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으며, ‘다 폰테 3부작’이 모두 성에 관계된 내용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알마비바 백작의 바람기가 빚어내는 소동, ‘코지 판 투테’는 두 여성의 정절을 시험하는 애인들 이야기, ‘돈 조반니’는 대놓고 여자들을 속이고 사냥하는, 당시에도 무척 불온한 내용이 문제가 됐던 오페라들이다. 지금으로 보면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일삼는 남자들의 수작을 오페라 부파(희극)로 만든 것이고,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모두 아무리 정숙한 여인도, 오늘 결혼한 새 신부도, 약혼자에게 지조를 맹세한 아가씨들도 새로운 남자의 희롱에 흔들리다가 곧바로 유혹에 넘어간다는 사실도 순전히 남자들의 시각에서 설정한 내용인 것이다.
LA오페라가 23일 개막한 ‘돈 조반니’는 2021년초 공연 예정이었으나 팬데믹으로 취소된 후 이번에 무대에 오른 것이다. 휴스턴그랜드오페라와 로열오페라하우스 등과 함께 만든 새 프로덕션으로 세트와 의상, 조명은 나쁘지 않았는데 연출이 매끄럽지 않고 마지막 지옥 불에 떨어지는 장면을 장난처럼 처리한 것이 좀 거슬렸다.
주인공 역의 바리톤 루카스 미첨과 돈나 엘비라 역의 메조 소프라노 이사벨 레너드가 압도적으로 훌륭한 공연을 펼치고, 나머지 가수들도 고르게 우수하다. 그런데 주요 배역 8명 중 3명이 중국계 가수였다. 10월15일까지 5회 공연이 남아있다.
<
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