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우-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필자는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유럽의 열강들이 지난 한세기에 걸쳐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이유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대지는 지구상의 그 어느 곳보다 비옥하다. 우리 일행이 탄 열차는 조그만 농가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광활한 밀밭을 통과했다; 이른 새벽부터 말을 이용해 경작지를 가는 농부들의 모습도 더러 눈에 뜨였다. 장장 12시간을 달린 끝에 키이우 인근으로 진입하자 차창밖의 풍경이 급속히 도시로 바뀌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철도는 여전히 깨끗하고, 편안하고 편리했다. 필자가 탄 열차는 제 시간에 키이우에 도착했다. 정확한 열차 운행은 우크라이나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전쟁통에도 키이우는 거의 정상인 듯 느껴진다. 러시아 침공 1년만에 키이우 인구의 절반이 외부로 탈출했지만 피난민들 중 상당수가 이미 되돌아왔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 390만 명 정도였던 주민 수는 현재 360만 명을 헤아린다.
연례행사인 얄타 유럽전략(YES) 모임도 여전히 우크라이나에서 열린다. (매년 크리미아의 얄타에서 개최되던 유럽전략 회의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리미아 반도를 침공한 2014년 이후 키이우로 개최지를 변경했지만 원래의 회의장소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다.) 올해 모임을 주관한 빅토르 핀추쿠 조직위원장은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을 하고 있다”며 “전쟁에 쏠린 세계의 관심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상황임에도 도시의 상점과 카페는 손님으로 붐볐다. 필자가 지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식사를 중단하고 대피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도시 곳곳에 스러진 “영웅들”을 애도하는 추모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고, 거리의 요소마다 모래주머니와 방어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지쳐보였지만 차분한 모습이었다.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 수와 파괴된 도시 중 어느 쪽을 잣대로 삼건 간에 우크라이나는 참담한 손실을 입었다. 벌써 수 년째 키이우에 거주 중인 독일인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우크라이나인들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사상자 집계가 늘어나는 감당키 어려운 ‘새로운 정상’(nomalcy)에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은 탈진과 포기를 한 묶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필자가 이야기를 나눈 현지인들 가운데 실지회복을 위한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실망스런 우크라이나군의 대공세는 전쟁이 장기화 될 것임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이우에서 필자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때이른 평화협상은 일시적 휴전을 의마할 뿐”이라고 말한다. 러시아군은 언제건 다시 처들어 올 것이기 때문에 평화협정은 전쟁의 부담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우크라이나인들은 한목소리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주문을 외우지만 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조금씩 다른 결이 느껴진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진정한 안전을 보장한다면 돈바스와 크리미아에 대한 러시아의 합법적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 휴전에 합의할 수 있다는 속삭임도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 않는 사람들이 대체로 협상과 절충을 거부한다”며 “우리는 전장터의 군인들과 일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생각을 물어야 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지금 키이우가 우려하는 대상은 러시아가 아니라 서방이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부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가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말로 예정된 슬로바키아 선거에서 뚜렷한 친러시아 노선을 표방한 포퓰리스트 총리가 예상대로 승리할 경우 유럽의 정책 변화를 시도중인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된다. 미국에서도 우크라이나 지지열기가 식고 있다. 관측통들은 러시아가 2024년까지 현재의 경로를 유지하며 버티기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2024 대선에서 러시아가 원하는대로 트럼프가 승리할 경우 워싱턴은 우크라이나를 걸고 블라디미르 푸틴과 거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은 노골적인 침략을 정당화하고 푸틴과 시진핑 같은 독재자를 더욱 대담하게 만드는 재앙의 시나리오다. 규범을 무시하는 독재자들은 국제 시스템의 규칙을 다시 쓰길 원한다. 로버트 케이건의 말대로 이들이 뜻을 이루면 국제사회는 정글로 변하고 만다.
서방세계는 종종 이념과 가치를 달리하는 독재정권의 편에 서서 전쟁을 치렀다. 아프간과 이라크, 월남은 물론 한국전 당시 고약스런 독재국가였던 남한도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세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우크라이나는 이들과 다르다. 독립국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서방세계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자유의 가치를 공유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장기적인 소모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비해 네배나 많은 인구와 15배가 넘는 경제규모를 지닌 대국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맞서 끝까지 버틸 각오가 되어 있지만 우방국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예일대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는 국제정치외교 전문가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정치외교분석 진행자다. 국제정세와 외교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석가이자 석학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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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드 자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