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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함정’에 빠진 푸틴

2023-08-28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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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브라시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소설보다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대부(God Father)’에 나오는 인물이다. 돈 비토 콜레오네의 이른바 인포서(집행자)로 오직 콜레오네의 말만 듣는 친위 별동대 격인 갱스터다.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이 브라시는 콜레오네의 숙적인 타탈리아 패밀리에게 살해당한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푸틴의 브라시’로 불리어 왔다. 러시아 민간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으로서 푸틴을 위해 인종청소 등 더티 잡을 도맡아 처리해왔다.


그런 그가 살해됐다. 누가 죽였나. 그가 탑승했던 전용기의 추락 원인으로 미 정보당국이 ‘의도적 폭발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 모든 정황증거는 푸틴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그의 죽음은 예견되어왔다. 쿠데타 음모자는 오래 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지난 6월 23일 그가 이끈 바그너그룹의 군사 봉기 때 그의 운명은 정해졌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에 놀랍다는 반응은 별로 나오지 않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놀랍지는 않다.’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으로 CIA를 비롯한 대부분 서방의 정보 수장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푸틴을 비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죽음이 따랐다. 독살되거나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등. 그런데 반기를 든 것도 모자라 벌건 대낮에 모스크바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 프리고진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푸틴은 허약한 지도자로 보일 수 있다. 그 프리고진이 그런데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체제 내 반 푸틴세력을 고무시킬 수 있다. 그러니….

프리고진의 죽음은 그러면 어떤 파장을 몰고 올까. ‘우크라이나 전선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반면 국내적으로는 파장이 클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분석이다. 이와 함께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프리고진은 진실을 말한 애국자란 신화가 될 가능성도 제기했다.

‘바그너그룹의 향방에 우선 관심이 모아진다. 해체될 가능성은 없다. 아프리카 등지에서 노다지를 캐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푸틴에게 충성을 바칠 것으로 보인다. 프리고진 제거를 통해 누가 보스인지 푸틴은 분명히 알려주었으니까.’ 나인틴 포티파이브지의 분석이다.


그러니까 푸틴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진다는 거다. 그러나 동시에 푸틴에게 가장 위험한 상황전개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바그너 그룹 멤버 중 상당수가 지하로 잠적해 무제한 테러전쟁을 벌일 가능성이다. 그 경우 ‘러시아의 레바논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는 거다.

어쨌거나 프리고진을 제거함으로써 푸틴의 국내 위상은 높아질 것이란 게 다수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프리고진의 죽음은 그러나 러시아는 다름 아닌 마피아 국가임을 보여줌으로써 푸틴 체제의 허약성을 노출하고 있다는 지적도 따르고 있다.

푸틴은 대(大)러시아의 차르인 양 행세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거짓말, 뇌물, 압제로도 통솔이 제대로 안 되는 썩어가는 제국으로 프리고진 살해에서 보듯이 궁극적으로 테러에 의해 권력이 유지되는 체제임을 노출시켰다는 것.

애틀랜틱지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비행기 추락사’란 쇼킹한 방법을 통해 푸틴은 힘을 과시하면서 체제 내 반대세력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푸틴은 독재자들이 저지르는 고전적 실수를 범했다. 힘을 폭력을 통해 과시함으로써 부서지기 쉬운 체제의 허약성만 노출시켰다는 거다.

이와 동시에 프리고진 제거는 의도하지 않은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보았다. 푸틴은 ‘독재자 함정(the dictator trap)’에 깊이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진단과 함께.

권력유지를 위해 단기적으로 힘을 과시한다. 이는 그러나 장기적으로 체제의 취약만 불러올 뿐이다. 배반했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겁에 질려 추종자들은 푸틴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정황에 새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일종의 중장기적 위험이라고 할까.

한 때 이너서클 중 이너서클로 불렸다. 그런 측근이 제거됐다. 다음에는 혹시 내가 아닐까, 그런 공포감이 권력주변에 확산된다. 자신의 안전에 걱정을 하다가 ‘푸틴이 차라리 없다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인사이더가 하나둘 늘어난다. 모반의 기운이 번져가면서 궁중 쿠데타 가능성이 커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위험은 푸틴의 정보 파이프라인이 좁아지다 못 해 경색되는 것이다. 20년 이상 독재체제를 이어오면서 푸틴의 정보 파이프라인은 이미 상당히 망가져 있다. 진실을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축출됐다. 주변에는 온통 ‘예스 맨’뿐이다. 그 ‘예스 맨’들은 푸틴이 듣고 싶어 하는 정보만 전달한다.

그 결과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길어야 3주면 끝난다는 정보 보고에 따라 푸틴은 침공을 단행한 것이다.

‘푸틴의 브라시’로 불려온 프리고진도 제거됐다. 그런 마당이니 얼마 안 남은 충직한 측근들조차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정보통로는 더욱 경색되면서 푸틴은 치명적 오산을 할 가능성이 더욱더 커진다는 거다.

그 치명적 오산의 결과는 그러면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체제붕괴일까, 아니면 제2, 제3의 우크라이나 전쟁일까. 문제의 심각성은 오판에 따른 전선확대에….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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