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세상은 자기의 어떤 믿음같은 카테고리에 갇혀 더 큰 세상사를 못 보는 세상이 아닌 것 같다. 두순(杜順) 다음 이조(二祖) 지엄(智嚴)을 스승으로 화엄학 연구를 위해 신라를 떠났던 의상(義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대사라는 칭호를 쓰지 않은 것은 종교 선입견을 우려해서이다.
그분에 대해서 법성게(法性偈)도 웹사이트에 나와있고 한문이지만 한글로 설법되어 쉽게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아직 한인들은 의상에 대해서 잘 모르니 아쉬운 생각도 든다.
의상의 본명은 김일지(625-702), 아버지 김한신, 어머니 선나부인, 그리고 이 집안의 골품은 진골(왕족 혈통)이다. 아버지는 아들 의상이 출가하기보다 촉망받는 화랑(신라때 문벌과 학식이 있고 외모가 단정한 청소년으로 조직되었고 심신의 단련과 사회의 선도를 이념으로 하였다)으로 가문에 기대가 컸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상은 화랑으로 전투에 참여했을 때 전장에서 삶과 죽음, 살육의 죄책감으로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화랑시절 동지들과 훈련으로 사냥을 갔다. 그런데 혼자 산양을 포기하고 하산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너는 훈련을 포기했으니 나라를 배신했고, 부모의 뜻을 어기는 불효를 저질렀고 또 함께하는 벗을 두고 혼자 도망을 쳐 신의까지 저버렸다”고 종아리를 때렸다. 아버지의 화가 풀린 그날 밤 의상은 아버지께 살생유택, 죄 없는 짐승을 훈련이란 이름으로 죽일 수 없었다고 여쭈었다.
아버지는 평소 생명을 중요시 여기는 아들 성격을 알고 있었고 나라의 이름 높은 사람이 되길 바랐지만 출가승이 되려는 아들을 한탄하며, 언젠가 신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언제 어디서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조건으로 허락했다고 한다.
출가한 의상은 650년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는데 도중에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해를 받아 수십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661년 두 번째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는데 원효는 도중에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가지만(하룻밤에 일어나는 해골물 일화도 있다) 의상은 혼자 그 먼 길을 가게 된다.
오래전부터의 염원, 큰 깨달음의 화엄사상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의상은 드디어 지엄(智嚴) 문하에서 영특한 재질로 화엄의 오묘한 뜻을 심도 있게 분석하여 화엄사상 체계를 수립했다. 이 화엄경은 깨달아야하는 객관의 대상이라는 뜻이며. 즉 우주의 대 진리인 법(法), 체(體), 상(相), 용(用)이며 법성게는 이를 칠언(七言) 삼십구(三十句) 이백십자(二百十字)로 축약하여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다.
우리에게 깨달음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경지를 걸림과 막힘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큰 깨달음 법성게 30구 중 처음과 끝쯤의 두 구절만 읽어보면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즉 아주 작은 한 티끌 안에 큰 세상이 들어있다고 되어있다. 이미 현실 안에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 칩처럼 가는 머리카락 속에 세상의 온갖 정보가 들어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리고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사람들 삶을 위한 보배가 하늘에 차 비처럼 내리지만.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사람들 그릇 크기만큼 받아간다고 한다.
큰사람, 작은 사람, 그 그릇은 누구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부단의 노력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기복신앙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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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남성복식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