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you again!”(독립된 조국에서 다시 보리라),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마지막 대사이다. 황기환 애국지사가 조국을 떠난 지 119년, 순국하신지 꼭 100년 만에 그처럼 그리던 조국에서 첫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기환 애국지사 봉환식을 위해 4월10일 새벽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정각 9시에 인천공항 계류장에서 군악대에 맞추어 삼군위장대 호위 속에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광복회원 대표들과 영혼 봉헌식을 진행하였다. 20여년 전 수여되었던 국민훈장 애족장을 이날에서야 비로소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고인의 영정 앞에 놓아드렸다.
독립된 나의 조국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나라를 잃었을 때 얼마나 비분 통탄하였던가. 1907년 이위종, 이상설, 이준은 황제의 칙서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갔으나 일본의 식민지라고 만국평화협의회에 참석을 못해 회의장 문 밖에서 칙서를 낭독하였다. 1919년 1월18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김규식 박사와 황기환 서기장은 파리 평화협의회 참가도 거절당하였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칙서 낭독 며칠 후 심장이 터져 외지에서 순국하셨듯 황지사는 4년 후 1923년 4월17일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순국하셨다. 독립된 나라의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면 묘비에 한글로 ‘대한인’이라 새겨놓았을까.
오전 10시 공항에서 식을 마친 후 곧바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향하였다. 삼군 군악대의 호위 속에 도착한 고인의 운구를 현충탑 중앙에 모시고 박민식 장관은 고인의 호적을 발표하였다. 국적을 찾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79-24, 279-22, 바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나란히 한 상해임시정부 기념건물이 있는 장소였다. 오후 3시 조총 발사로 식이 끝나고 안장식이 이어졌다. 우리 부부가 가족을 대표하여 고인의 무덤에 한줌 흙을 뿌리고 이어 흙을 덮었다. 조국의 품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121호가 황지사의 자리이다. 이곳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애국열사들이 묻힌 곳이다. 황 지사의 묘소가 마지막 자리였다. 몇 시간 늦었어도 새로 마련된 묘역에 묻힐 뻔하였다. 고인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애국열사들, 그동안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한자리에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뻐하실까, 고인을 안장한 후 눈물이 쏟아졌다.
뉴욕에서 고인의 묘소를 찾아내고 돌본지 15년, 어느새 정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늘나라의 가족들이 흘리는 눈물이었을까. 100년 기다린 끝에 대한인으로 자리를 찾은 감격스러운 눈물일까. 뉴욕에서 다시 뵐 수 없다는 석별의 눈물일까. 이제 나는 그의 비석만이 서있는 뉴욕의 빈 무덤을 찾아가야 한다.
모든 예식을 마친 일행은 다음날 오전 10시 서울에서 상해임시정부기념청사 광장에 모였다. 이 날은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04주년이 되는 날, 동시에 황기환 지사의 호적이 이 주소로 기록되는 날이었다. 박민식 장관의 기념사와 더불어 황 지사의 호적 입적이 다시 한 번 선포되었다. 비가 내렸다. 영령들의 눈물일까. 우비도 쓰지 않은 채 다들 옷이 흠뻑 젖었다. 식을 마친 후 기념청사를 둘러보았다. 황기환 지사의 호적지가 되었으니 그분의 집을 방문하는 느낌이었다.
이번 일을 통하여 몇 가지 사실을 배우고 깨달았다. 첫째 무슨 일이든지 진실과 인내를 가지고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둘째 역사의 한 페이지는 적어도 100년은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일생에 가장 뜻 깊은 경험이었다. 또한 보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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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전 뉴욕한인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