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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소된 루저 도널드

2023-08-01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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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빌딩 아파트 건너 편 하워드 존슨 호텔 방에서 전직 FBI 요원 알프레드 볼드윈은 TV로 ‘꼭두각시 인형들의 공격’이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볼드윈은 닉슨 재선 위원회가 워터게이트 빌딩 안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을 도청하라고 보낸 일당 중 하나로 망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그들은 운이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출입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테이프를 경비원이 발견한 것이다. 경비원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지만 망을 보던 볼드윈은 TV에 정신이 빠져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뒤늦게 연락을 했으나 이미 늦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있던 일당 5명은 모두 체포됐다.

경찰은 이들 가방에서 일련 번호로 된 100달러 지폐 포함 2,300 달러를 발견했고 일당 중 한 명이 닉슨 재선 위원회 명의로 된 체크를 자기 구좌에 입금한 사실을 밝혀냈다. 닉슨은 자기 비서실장에게 “어떤 멍청한 놈들이 이런 일을 벌였나”고 물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봐 워터게이트 침입에 관여하지도, 알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정치 스캔들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CIA로 하여금 FBI 수사를 막도록 하는 등 은폐 작업에 나선다. 1972년 10월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은 워터게이트 주거 침입은 닉슨 재선 위원회의 조직적인 정치 사찰 작업의 일환으로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그 해 대선에서 닉슨이 승리하면서 끝난 것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체포된 일당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가 이 문제를 파고 들면서 새 국면을 맞게 된다. 연방 상원 워터게이트 위원회 조사 결과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닉슨 행정부와의 관계를 은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증언이 나오고 백악관에 이를 입증할 수 있는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연방 대법원이 이 테이프의 제출을 명령하고 그 결과 닉슨이 은폐를 명령하고 수사를 방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탄핵 여론이 거세게 일자 닉슨은 결국 1974년 8월 9일 미 역사상 처음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만약 닉슨이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자신이 모르는 사이 부하들이 저지른 일임을 깨끗이 밝히고 수사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탄핵 직전까지 가다 사임하는 치욕을 맛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이후 ‘원죄보다 이를 은폐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미국 정치판의 상식이 됐다.

닉슨이 쫓겨난 지 50년이 돼 가지만 아직도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인간이 있는 모양이다. 국가 기밀 문서를 빼돌린 혐의로 루저 도널드를 기소한 연방 검찰은 지난 주 자신의 범죄를 은폐할 목적으로 플로리다 자기 집 비디오를 삭제하려한 혐의로 그를 추가 기소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연방 검찰이 22년 6월 24일 마라라고 자택 감시 카메라 비디오를 압수 수색하려 하자 도널드의 집사 월트 나우타가 IT 책임자를 만나려 했으며 25일 건물 관리인인 카를로스 디 올리베이라와 감시 비디오가 있는 경비실과 지하에 있는 보관실에 들어갔다. 이틀 뒤 디 올리베이라는 IT 책임자를 ‘오디오 클로짓’으로 불리는 작은 방으로 데려가 녹화 영상이 얼마나 오래 보관되는지를 묻고 “보스”가 “서버가 지워지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 검찰은 나우타와 디 올리베이라도 기소할 예정인데 그렇게 되면 이들은 보스인 루저 도널드가 뭐라고 얘기했는지 실토하거나 본인들이 오랫동안 감옥 살이를 하거나 양자 택일을 하게 될 것이다.

검찰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루저 도널드는 단순 국가 기밀 유출보다 더 심각한 법적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루저 도널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기밀 문서를 가지고 나온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는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을 덮으려고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가 법을 어긴 것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뒤로는 증거를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번 추가 기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대선 주자로서의 루저 도널드의 위치는 변함이 없을 모양이다. 최근 뉴욕타임스 여론 조사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은 54%로 2위인 론 디샌티스를 37% 포인트 앞서고 있다.

루저 도널드는 이번 기소 외에도 대선 결과 조작 혐의를 수사하고 있는 조지아 주 검찰과 1월 6일 의사당 난입과 관련된 연방 검찰의 추가 기소가 유력시 되고 있다. 병든 공화당을 제외한 미국인들이 이런 인물에 표를 줄 지 두고 볼 일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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