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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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가장 밑 바닥

2023-07-1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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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살다 한국에 들어와 생활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자기 명의로 된 스마트폰이 없이는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금융 거래는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으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실명 핸드폰을 통해 본인 인증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미국에서는 비즈니스 구좌라도 유저 네임과 비밀 번호만 있으면 되지만 한국에서는 공인 인증서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거래 한 번 할 때마다 OTP(one time pass code) 카드를 눌러 비밀 번호를 추가로 받아야 한다. 은행에 가서 현금을 찾을 때는 이것이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기 사건이 빈발하길래 이런 복잡한 장치를 마련했을까 궁금해 할만 하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사기 범죄 건수는 2011년 22만 건에서 2020년 35만 건으로 치솟았다. OECD 회원국 중 1위다. 사기는 아니지만 이보다 더 죄질이 나쁜 무고와 위증도 선두를 달린다. 우리 나라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 다른 일본과 비교하면 인구 비례로 위증은 24배, 무고는 38배가 많다. 한마디로 거짓말에 대한 한국인의 죄의식은 무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개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도 나쁘지만 국민 전체를 상대로 괴담을 퍼뜨려 사회를 혼란케 하는 것은 죄질이 더 나쁘다. 개인 간의 범죄는 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으로 끝나지만 괴담은 나라 전체의 질서와 안정을 해친다. 2008년의 광우병 괴담이 대표적 사례다.

15년 전 미국산 소고기를 가지고 ‘광우뻥’을 쳤던 세력은 이번에 후쿠시마 오염수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재미를 보려 기를 쓰고 있다. 등장 인물이 식상할 정도로 그때와 같고 근거 없이 후쿠시마 오염수가 방출되면 한국민이 다 죽는다고 아우성 치는 것도 똑 같다.

이재명은 40년간 원자력을 공부한 옥스포드대 교수가 후쿠시마 오염수가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하자 “돌팔이”라 불렀다.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후쿠시마 오염수가 국제적 기준이 비춰 볼 때 문제가 없다고 하자 괴담 세력은 이 단체가 일본 돈을 받고 일본에 유리한 보고서를 내놨다고 우기고 있다.

IAEA는 그렇다 치고 일본 돈을 받지 않은 미국은 어떨까. 미국에서 핵 문제를 총괄하고 있는 ‘원자력 규제 위원회’(NRC)는 2011년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유출된 후 이것이 미 서부 해안의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2015년 후쿠시마 원전에서 유출된 오염수 방사능의 농도는 미국인의 건강과 환경에 어떤 위험을 초래하기에 크게 낮은 수준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2011년 배출된 오염수는 ALPS 장치를 통해 방사능 물질이 걸러지지 않은 것인데도 이런 결론이 나왔다면 이를 통해 정화된 오염수는 이보다 더 무해할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기준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연방 식품 의약국(FDA)도 2021년 10년간 일본 수산물의 방사능 오염도를 조사한 후 2011년 내려졌던 일본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일본산 수산물에서 검출된 방사능의 양이 너무 적어 미국인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군사 동맹이니까 그렇다 치고 미국 못지 않게 자국민의 건강을 중시하는 유럽은 어떨까. 유럽 연합(EU)은 지난 주 후쿠시마 지역 수산물을 비롯한 일본산 식품에 대한 규제를 공식 철폐했다. EU의 이번 조치는 물론 일본 수산물이 안전하며 앞으로 오염수가 배출되도 그럴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국 원자력 문제 권위자인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ALPS를 거쳐 배출되는 후쿠시마 오염수는 세슘 등 방사능 물질은 걸러지고 삼중수소만 남는데 그것도 한강물에 존재하는 수준이라며 2011년 당시 걸러지지 않은 오염수가 하루 300톤씩 배출됐지만 한국 수역에서는 전혀 검출된 바 없다고 밝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괴담 세력은 후쿠시마 오염수를 독극물 취급하고 이에 놀란 일부 시민들이 아직 배출되지 않은 오염수에 겁을 먹고 천일염을 사재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오염수에 포함돼 있는 삼중수소는 물의 일부로 소금을 만들 때 증발하기 때문에 소금에 섞이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단테는 그의 대작 ‘신곡’에서 지옥의 제일 밑 바닥에 가장 무거운 죄를 저지른 자를 배치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간통도 살인도 아닌 사기였다. 신이 인간에 준 가장 귀한 선물 지능을 악용해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인 신뢰를 해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지옥이 있다면 괴담 세력은 그 제일 밑바닥에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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