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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 잊혀진 영웅들

2023-07-10 (월)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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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을 세워 승전한 군인을 영웅으로 부르고 패장과 포로된 자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문화를 갖고 있다. 한국동란 초전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전쟁 포로가 많이 발생했는데 과연 그들은 영웅이 못되는 것일까?

6.25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날부터 며칠에 걸쳐 유엔은 안보리를 소집해 세 번의 결의문을 선언한다. 82호: 북한은 불법침략을 당장 중단하고 38선 이북으로 철군하라. 83호(6월 27일): 평화와 안보 회복을 위해 남한을 지원한다. 84호(7월 7일): 미국이 유엔군 통합사령부를 책임 맡고 유엔기 사용을 허가한다.

안보리 결정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가장 근거리 일본에 주둔한 미8군 소속 윌리엄 딘 소장(6.25 당시 미 8군 24보병사단장)에게 군대를 곧 바로 파병하라 명한다. 임무는 유엔군이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다.


딘 소장은 급히 스미스 대대(500명 정도)를 7월 1일 수송기로 먼저 보내고 남은 24사단 병력(약 16,000명)을 수로를 통해 보낸다. 본인도 7월 3일 대전에 도착했다. 한국군 참모(백선엽 등)들은 인민군이 생각보다 매우 강하니 신중해야 된다고 충고했는데 미군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적을 얕잡아 봤다. 미군이 나타나면 혼비백산 도주하리라는 생각까지 했다. 전쟁과 운동경기는 마찬가지다. 적을 깔보면 패하기 십상이다.

오산에 먼저 도착한 미군은 바로 패하고 천안으로 물러났다가 거기서 또 본대가 있던 대전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를 예상했던 인민군은 동쪽을 뺀 세 방향으로 대전시를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미 24사단병력은 이미 4,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후퇴를 명했고 급한 나머지 장군 신분이면서 직접 바주카를 쏴 적의 T-34 탱크를 5대나 파괴했다. 후퇴 중 본인이 탄 지프가 회전할 골목을 놓치고 질주하는 바람에 본대와 떨어지고 말았다.

사단장을 따라온 몇몇 안 되는 병사들은 거의 부상자였다. 깜깜한 밤 중에 갈증을 호소하는 부하들을 위해 딘 소장은 직접 물을 길으러 개울로 갔다가 발을 헛딛고 그만 낭떨어지로 떨어졌다. 어깨는 부러지고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다. 이제는 홀로 남게 됐다.

다행히 민간인 박종구 씨를 만나 음식을 얻어먹고 허기를 달랬으나 삼복더위 속에 음식이 온전할 리 없었다. 배탈이 나고 이질에 걸려 185센티 장신에 체중 95kg이었던 거구가 고작 59kg밖에 나가지 않았다. 홀로 산속을 헤매고 숨어 다니다 한두규를 만난다. 그에게 백만 원을 줄 테니 대구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달라고 청했다.

한두규는 친절하게 자기를 따라오라 하고는 딘 소장을 인민군에게 넘겨버렸다. 그 때가 8월 25일 본대와 헤어지고 36일 만이다. 한두규는 어리석게도 미군의 포상을 믿지 못하고 단 돈 5달러에 우리를 구하러 온 장군을 적에게 넘겼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알고 있던 딘 소장은 적진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기밀을 누설할까 두려워 자진을 시도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인민군은 그를 고문하지 않았다. 그가 장군이란 걸 알게된 후에는 최고의 예를 갖추기까지 했단다.


미국에선 딘 소장의 실종 후 사망으로 간주하고 가족들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그의 생존 소식은 호주의 윌프레드 버체트 특파원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평양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했던 것이다. 딘 소장은 휴전 후 1953년 9월 4일 포로석방 교환조건에 의해 판문점을 통해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사상대로면 딘 소장은 영웅이 못되는 것인가? 그는 유엔군 전력부대가 7월 20일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적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대전에서 후퇴하던 7월 21일까지 성실히 수행했다. 장군의 신분으로 무기를 들고 싸웠고 부하들을 위해 물을 직접 길으러 가기도 했다.

포로 기간 동안 가진 협박에 굴하지 않고 적의 요구에 끝까지 협조하지 않는 군인의 본분을 지켰다. 자신을 밀고한 한두규가 후에 체포되고 사형 선고를 받는데 그를 살려달라고 탄원함으로 그를 구한다. 전혀 관계없는 남의 나라에 와서 고초를 이겨내며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국가에 충성한 딘 소장은 미국에선 영웅으로 칭한다. 우리도 잊어서는 안될 진정한 영웅이다.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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