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십년간 대기업들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불만을 터뜨리던 보수적 소비자들이 이제는 아예 기업의 경영 정책 자체를 바로잡고 싶어한다. “취소 문화”(cancle culture)를 비판하는데 싫증이 난 이들은 이제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취소하고 있다. 이른바 ESG 투자에 극단적인 맞춤형 공격을 가해온 보수성향 소비자들이 자체적인 “공화당 ESG”를 고안해 낸 듯 보인다. ESG 투자란 투자 결정 과정에서 기업의 재무적 요소와 더불어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및 지배구조(governmance)까지 함께 고려하는 투자를 뜻한다.
한때 “맥주의 왕자”였던 버드 라이트가 권좌에서 끌려 내려온 것이 좋은 예다.
지난 20여년간, 버드 라이트는 미국에서 자장 잘 팔리는 맥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한 인플루언서의 인스타그램 포스트에 이성을 잃은 보수주의자들의 거친 공격으로 말미암아 버드 라이트의 위상은 한순간에 추락했다. 버드 라이트는 “3월의 광란”을 맞아 여러 명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에게 개인 맞춤형 맥주 캔을 보냈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판촉활동이었지만 이들 가운데 한 명인 딜런 멀베이니가 트랜스젠더인 게 문제가 됐다. 멀베이니가 새로운 캔을 극찬하는 포스트를 올리자 마치 기다리기나 한 듯 우파진영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버드 라이트 때리기”에 나선 보수적 인사들 가운데 키드 록은 버드 라이트 캔을 사격연습용 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컨트리뮤직 스타인 트래비스 트리트는 공연 의전 부칙(hospitality rider)에서 버드 라이트와 그밖의 모든 앤호이저 부시 제품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다른 유명 인사들과 그들의 팔로워들도 버드 라이트를 기피대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컨설팅업체인 범프 윌리엄스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6월3일로 끝난 한주간의 버드 라이트의 판매는 2022년 동기에 비해 거의 25% 급감했다. 보수성향의 해설가들은 최근 “사회정의 운동”(wokeness) 동조 기업으로 찍힌 타겟, 콜스, 크래커 배럴을 비롯한 주요 기업들의 주가하락에 환호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당 기업들의 죄목은 직원의 인종적 다양성을 감독하는 인사 담당자를 둔 것에서부터 성소수자 인권의 달인 프라이드 먼스에 무지개 테마의 원지(onesie: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이어진 의복)을 판매했다는 것까지 다양하다.
진보주의자들이 동성결혼 혹은 낙태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기업들이 보다 진보적인 자세를 취해줄 것을 요구할 때마다 보수진영이 전개한 불같은 비판공세를 감안하면 버드 라이트를 겨냥한 보수주의자들의 행동은 영락없는 위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필자는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서 펼치는 이같은 소비자 행동주의에 전혀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
우파분자들이 이미 매입한 고가의 커피-메이커를 창밖으로 집어 던진다거나, 인기있는 운동화에 불을 붙여 태우거나, 아침식사 대용품인 시리얼을 변기 속에 처박는 행위는 필자가 상관할 바 아니다. 자신의 소유인 가전제품이나 의복, 또는 집안의 배관시설을 망가뜨리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이자 권리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들이 앤티-LGBT와 인종혐오단체에 기부금을 낸 것으로 밝혀진 치킨 샌드위치 체인 칙필레이(Chic-fill-A)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펼치는 것 역시 제 3자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제도를 망가뜨리려 시도한 정치인들에게 기부금을 주지 말라며 기업들에 압박을 가한 진보주의자들에게 필자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에게는 원하는 곳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어떤 이유에서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의 본인 소유 제품을 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말할 필요없이, 기업들은 이런 형태의 “자본주의 처벌”을 싫어한다. 역사적으로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는 기업들은 분열적인 문화전쟁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여기에 휘말릴 경우 소외감을 느낀 일부 구매자들이 떨어져나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극히 부분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기업들은 친 사회정의 운동, 혹은 반 사회정의 운동 진영에 속한 듯 비춰지는 것을 꺼린다. 소비자 기반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어느 쪽에도 혐오감을 주지 않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최근 일부 기업들이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대체로 대주주 혹은 동업자의 의사 때문이지만 고객들과 종업원들이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입장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해 일부 대기업들은 낙태권의 마지막 방화벽 역할을 수행했다. 낙태권을 헌법이 보장한 자유로 볼 수 없다는 연방대법원의 돕스(Dobbs) 판결이 나온 이후 대기업 수장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니라 반 낙태기업으로 몰릴 경우 직원모집에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타겟은 LGBTQ의 이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돈벌이 목적으로 이들을 위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기업들 또한 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원하는 마케팅과 인사 정책을 얼마든지 시행할 수 있다. 만약 보수주의자들이 이같은 기업전략에 취소 문화의 주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려든다면, 그렇게 하도록 놓아두라. 다시 말하지만 그들에겐 그것이 자본주의다.
최소한 소비자들과 기업들은 이같은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 정부 관리들에게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대기업의 사회정의 운동에 관한 담론에서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소비자 보이코트와 정부의 행위가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대통령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공화당 후보들 가운데 최소한 두 명은 정치적 견해를 표시하는 기업들을 처벌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실제로 플로리다 주지사인 론 디샌티스는 미키 마우스를 없애려 시도했다. 디즈니가 감히 그의 반동성애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LGBTQ 직원들의 압력에 마지못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투자자인 베벡 라마스와미의 선거공약은 전적으로 사회정의 운동에 대항하는 십자군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소비자들이 언제 어디에서 물품을 구입할지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미국적 방식이다. 반면 정치인들이 공권력을 이용해 동지에게 상을 주고 적에게 벌을 주는 것은 명백한 독재주의 방식이다.
캐서린 램펠은 주로 공공정책, 이민과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워싱턴포스트지의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이다. 자료에 기반한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램펠은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바 있다.
<
캐서린 램펠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