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날을 지나면서 문득 오래전에 본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1949)’이라는 연극이 생각난다. 대공황이란 급격한 변화 속에서 30년간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가장 윌리 로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평범한 미국 중산층인 윌리가 직업을 잃고 혼란을 겪으며 무너져가는 모습과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의 심리를 세밀하게 다루며 산업화되고 물질주의화 된 현대문명 속에서 마치 하나의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소시민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그 연극 대사 중에서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너희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란 건 아니야. 너희 아버지는 큰돈을 번 일도 없고,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어. 하지만 네 아버지도 인간이야. 그러니까 소중히 대해드려야 해. 늙은 개처럼 객사를 시켜서는 안 돼.”
사회적으로 성공이라는 것을 하지 못한 주인공인 아버지 윌리에게 아들들이 등을 돌릴 때, 끝까지 깊은 연민과 아내로서 남편을 지키는 린다의 말이다.
이 연극과 오버랩되며 떠오르는 장면들이 또 있다. 지난 25년간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토크쇼 중 하나였던 오프라 윈프리 쇼의 장면들이다. 30대~50대의 가장 7~8명이 출연하여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아 많은 아버지들의 공감을 얻은 바있다. 사회라는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 던져진 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아버지들, 혼자만의 삶도 버거운데 가족의 행복이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무거운 책임감, ‘나’는 없어지고, 삶의 중심이 아닌 ‘밖에 있는 존재(outsider)’로서 가족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소외감, 아이들의 꿈, 가족 공동의 꿈에 밀린 채 자신의 꿈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좌절감 등을 그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토로했다.
‘남편’이요 ‘아버지’인 그들도 세상이 두렵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하나의 인간이요, 가족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 나름대로의 꿈이 있다는 것을 아내나 자식들은 모르고 살아간다.
이 세상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앞에 언급한 가장들같이 매일 가족을 위해 더러워도 허리 굽히고 손 비비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가슴 속에 꿈 하나 숨기고 자신을 팔기 위해 무거운 가방 들고 정글같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유능한 남편, 당당한 아버지,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삶의 정글에서 짐짓 용감한 투사인 척 해보이지만, 이리 몰리고 저리 부대끼고 남은 것은 빈껍데기 꿈뿐이다. 아버지는 자식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땅속 깊이 자신을 낮추고 숨겨져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뿌리같은 존재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존재다. 아버지는 끝없이 강한 불길 같으면서도 자욱한 안개와도 같은 그리움의 존재이다. 아버지는 세월이 흘러도 가슴에 하나의 뜨거움으로 다가오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내 가족이 세상에 치이고 다쳤을 때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아버지는 늘 안식의 언저리에서 나를 지켜주는 사람, 언제까지나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존재이다. 그런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낯선 사람이 숨어있다.
침묵과 고단함을 자신의 베개로 삼는 사람.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는 사람. 너털웃음 웃고 돌아서서 황혼녘 야윈 골목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이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사람,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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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렬 수필가·화가·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