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인에서 한인 주디 리씨가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의 학생 대부분은 초중고생들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세대의 수강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60세 이상의 시니어들이다. 대부분은 여성 시니어들로 수십 년 전 잠깐 피아노를 배웠다가 그만뒀던 수강생도 간혹 있지만 거의 모두는 피아노를 생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다.
60대의 한 수강생은 “경제적^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피아노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악기를 배우면 노년의 인지능력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도 들어 용기를 내 등록했다”고 말했다. 이 학원은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배울 수 있도록 시니어 학생들에게는 한국말을 잘하는 강사들을 배정해주고 있다.
흔히들 악기 배우기를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비유한다. 언어 습득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악기의 습득 역시 성장기에 이뤄져야만 한다고들 여긴다. 시기를 놓치면 따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악기를 마스터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게임”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런 인식에 맞서 인생의 중반기를 훌쩍 뛰어 넘은 장년과 노년 시기에 ‘버킷 리스트’의 하나로 새로운 악기 배우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경제활동과 양육 같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삶이 한층 더 홀가분해진 시기에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노년의 악기 배우기는 건강상 효과까지 뛰어나다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면서 이런 도전은 한층 더 활발해지고 있다. 피아노 등 새로운 악기 배우기에 나선 많은 시니어들은 “살아오는 동안 내내 가려웠던 부위를 시원하게 긁는 기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악기를 배우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사정과 형편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아쉬움을 털어낸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뉴욕 대학의 뇌 과학자인 개리 마커스는 “나이든 사람들은 새로운 악기를 배울 수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시간이 더 걸리고, 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새로운 악기를 배우고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페셔널 뮤지션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음악은 뇌를 자극하고 기억력을 촉진시켜준다. 한 연구에서는 단 한 번도 악기를 배워본 적이 없던 60세에서 85세 사이의 노인들이 매주 1회씩 수개월 동안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했더니 언어 구사능력과 처리 속도가 향상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기준을 더 높게 설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이들은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에 손쉽게 나서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설사 도전에 나서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기준 때문에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나이가 든 뇌는 가소성(plasticity)이 떨어지지만 굳어 있는 뇌를 다시 와이어링하는 치열한 과정은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악기를 배우는 속도는 느릴지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시니어들의 삶의 경험은 새 악기를 배우는 데 아주 유용하다는 얘기다.
피아노에 도전하고 있는 한 한인 시니어는 “빨리 배우겠다는 욕심은 전혀 없다”며 “배우는 과정 그 자체가 즐겁고 소중하다”고 말했다. 손주들의 생일 날 ‘해피 버스데이’를 직접 연주해주고 싶다는 마음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새로 도전하는 악기가 꼭 피아노여야 할 이유는 없다. 기타와 우클렐레, 플롯, 하모니카, 드럼 등 어떤 악기라도 좋고 초등학교 시절 불었던 경험이 있는 레코더를 다시 집어 들어도 괜찮다. 전문가에게서 지도를 받을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유튜브에 무수히 올라와 있는 악기 교습 동영상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는 것만 기억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