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脫)달러란 테일리스크
2023-05-19 (금)
김흥록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
최근 미국과 영국의 금융가에서 조용히 불붙고 있는 화두는 달러의 지배력 논쟁이다. 과연 달러 지배력은 감소하는 중인지, 실제 달러 패권이 사라질 수도 있는지에 대한 논의다. 영국 런던의 금융업체 유리즌SLJ캐피털이 논쟁의 문을 열었다. 이 업체는 달러의 지배력 지표 중 하나인 세계 각국 준비금 중 달러 비중이 줄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2003년 60%대였던 달러 비중은 2021년 55%로 떨어졌고 지난해는 47%까지 낮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달러 준비금 비중의 감소 속도는 20년 연평균치의 10배에 달해 달러 지배력이 지난해부터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 이 업체의 주장이다.
달러 패권 불안을 주장하는 쪽은 유리즌SLJ캐피털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탈달러화는 현실이며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의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도 “무역 거래 때문에 각국이 달러를 보유하고 있지만 지배력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 백악관 경제학자인 조셉 설리번은 “달러 지배력은 브릭스(BRICS)가 준비하는 통화로 인해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수 있다”며 “달러 패권은 하룻밤 사이에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지배력은 천천히 침식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적대국을 상대로 한 미국의 금융 제재가 달러 지배력을 감소시키는 원인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적지 않다. 골드만삭스는 최근의 달러 패권 논쟁은 관련 의견 개진이 많아진 것일 뿐 실제 달러 지배력 감소와는 상관없다고 선을 긋는다.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은 “그렇다고 세계가 위안화를 원하겠냐”며 따져 물었다.
분명한 점은 달러 패권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러시아나 이란·중국 등 미국의 적대국을 넘어 제3국이나 우방국에서도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옆에서 “달러의 치외법권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달러를 정면 비판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계속 달러에 의존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지난주 열린 아세안정상회의는 역내 무역 거래에서 달러보다 자국 화폐를 쓰자는 내용의 ‘결제통화협정(LCS)’을 체결하며 탈달러 행보에 속도를 냈다.
달러가 영국 파운드화를 넘어 세계 정상 통화의 지위에 올라선 것은 1920년대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는 달러가 지배 통화인 세상에서 나고 자랐고 이에 우리는 달러 패권 체제를 자연스럽게 경제의 상수로 삼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불거진 논란은 달러 패권이 세계경제의 기본 전제가 아닐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미국과 세계 각국은 대답을 고민해야 한다. 영국도 한때는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였다.
유리즌SLJ캐피털은 달러의 지배력이 장기적으로 감소한다면 이는 달러와 유로·위안화의 3극 통화 체제가 될 것으로 본다. 일각에서는 세계 각국이 상호 통화로 무역을 하면서 다극 통화 체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어느 쪽이 됐던 달러의 절대 지배력이 무너진다면 미국은 지금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막대한 무역수지 적자도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무엇보다 국채 수요가 감소해 미국의 재정 규모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미국 국내총생산(GDP)과 실질소득 감소, 국방 예산 축소에 따른 세계 외교·안보 지형의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변화가 우리나라의 외교·안보·통상·금융전략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따져보는 게 지금 우리의 과제다. 달러 패권 문제는 테일리스크(tail risk·발생 가능성은 적지만 한 번 현실화하면 파장이 큰 리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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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록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