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어머니’보다 ‘엄마’가 좋다

2023-05-17 (수) 조광렬 수필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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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에 계신 어머님과 페이스톡을 했다. 어머니 얼굴이 휴대폰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어머니! 저예요.” 그래도 별 반응이 없으시다. “어! 어? 누구?” 하신다. “저 광렬이예요.”해도 마찬가지다. 어머니 곁에서 아우가 “미국이예요. 형, 큰형님”하고 일깨워드려도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시간이 걸리시는 모양이다. 그때 내가, “엄마~ ! 나야! 광렬이!” 하니 그제야 “어! 우리 큰 아드을!”하시며 반가워하신다.

그제야 정상적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우의 전언에 따르면 대화할 때는 멀쩡하신데 전화를 끊고 조금 지나면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모르신다고 했다. 그러함에도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시집살이 하던 시절은 또렷이 기억하시며 “부잣집이라고 시집와서, ‘국회의원 며느리가 삯바느질에, 물지게진다’고 수군거리더라”는 말씀은 아직도 수시로 하신단다.


이번에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휴대폰 앞에 계신 당신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니 못 알아들으신 듯한데, “엄마”라고 부르니까 반사작용처럼 금세 미소를 띠신다. 어머니 얼굴에 생기가 확 도는 걸 느꼈다. 어머니는 역시 엄마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엄마’라고 부를 때의 내 기분을 뭐라 할까, 마치 나를 에워싼 모든 것이 갑자기 아늑해진 느낌과 함께 마음이 편안해진다. 머리와 마음속에 쌓였던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듯하다. 그걸 알면서도 왜 난 여지껏 엄마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라는 말은 존대말도 공경심이 깃든 단어도 아닌데도 말이다.

어머니의 존칭은 ‘어머님’이다. 한국 사람들은 철이 들면 부모에게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한다. ‘엄마’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어머니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있다.

엄마라고 부를 때는 왠지 “나는 영원한 당신의 새끼입니다”라는 뜻이 절로 따라붙는 듯 느껴진다.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자식이 아무리 머리가 허연 늙은이라도 그저 내 새끼인 것이다. 모든 이해관계나 체면 여부를 떠나 당신의 뱃속에서 나온 ‘내 피붙이’인 것이다. 평생을 ‘엄마’라고 부르는 딸들이 아들들보다 더 어머니와 친밀하고 살뜰한 정을 나누며 지내는 비결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엄마!’라는 말속에는 고향의 냄새가 물씬 난다. 엄마는 고향이요, 유년의 젖이다. ‘어미 모(母)’의 한자는 여성의 가슴 모양에서 나왔다. 고향은 돌아갈 곳이다.

모국, 내가 태어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더 큰 의미의 어머니다. 고향을 떠난 우리 동포들은 다 엄마 품을 그리워하는 자식들이 아닐까 싶다. 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디아스포라의 삶이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어머니와 모국은 나이가 들어도 기대고 싶은 “생명의 언덕이요 뿌리”다. 나는 어머니 연세가 여든이 되면서부터는 혹 어찌되시지나 않을까하는 공연한 걱정과 함께 효행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늘 편치 못했으나 어머니는 다행이고 고맙게도, 이 나이에도 내가 ‘엄마’를 부를 수 있게 해주고 계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어머니는 며칠 후면 만 102세가 되신다. 당신의 남편보다 2곱절하고도 7년을 더 살고 계시는 것이다. 기억력이 많이 저하된 것 외에는 아직은 건강하신 편이다. 큰 축복이요,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광렬 수필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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