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에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언제 들어도 정겨운 이 노래의 주인공 현미가 지난 4월 4일 하늘의 별이 되어 떠났다. 평소 고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 하느님 저를 데려가시려면 제가 잘 때 데려가세요.” 그녀는 자기 소원대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별세는 세인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사망 전날까지 그녀는 왕성한 활동을 하여 모두가 데뷔 70년 행사를 무사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미는 20세 때 미 8군 무용수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그녀는 첫 무대에서 노래로 데뷔했던 일을 이렇게 얘기했다. “함께 공연한 여가수가 펑크를 내자 밴드 리더가 갑자기 그녀에게 대신 노래할 것을 지시했다. 당황한 그녀는 얼떨결에 ‘Bessame Mucho’ 을 부르고 앵콜되자 ‘Oh Danny Boy’를 불렀다. 그리고 무대 뒤로 돌아와 그냥 울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마냥 부끄러워서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수줍던 그녀는 흑인 5인조 그룹 ‘The Platters’의 노래 ‘Only You’, ‘My Player’, ‘The Great Pretender’ 등을 거의 흡사하게 불러 인기를 얻었다. 당시의 미 8군 실력 기준은 누가 가장 원곡의 노래를 비슷하게 부르는가? 한마디로 누가 가장 모창을 잘하느냐? 그것이 노래 실력의 기준이었다. 본인의 개성과 창의력은 평가되지 않고 누가 최신의 미국 팝송을 가장 잘 모방하느냐에 따라 최고의 가수 대접을 받았다. 평가 기준은 AA, A, B C 로 나뉘며 현미는 ‘Platters’의 노래를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불러 최고 등급인 AA를 받아 한국의 여자 Elvis Presley라고 불리던 ‘미스 K’와 함께 최고의 미 8군 무대의 스타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이봉조를 만난 것이 그녀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이봉조는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녀를 가요계에 데뷔시켰다. 수줍음이 많던 소녀는 24세에 취입한 ‘밤안개’가 대박이 나자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취입한 노래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무작정 좋았어요’, ‘몽땅 내 사랑’ 등등 히트 송을 연달아 발표했다. 1974년 그리스 가요제에서 ‘별’이란 노래로 입상하여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다. 또한 미 대통령인 레이건의 취임식에 초대되어 축가인 ‘주기도문’을 불러 앵콜을 받고 ‘Amazing Grace’와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연달아 노래하는 영광을 가져 그녀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한국 연예인들인 최희준, 위키 리, 박형준, 유주용, 현미, 한명숙, 곽순옥, 김상국 등이 1967년 KBS TV 방송국이 탄생한 이후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약은 한국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가요계는 일본식 스타일의 트로트, 맘보, 차차차, 트위스트 등의 음악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8군 무대 출신들의 등장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한국식 토속 음악과 8군 무대 스타일이 혼합하여 이른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탄생되어 팬들은 가요계의 풍성하고 다양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현미는 원로 가수로서 스스로 모범을 보여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고 사망하기 하루 전까지 ‘현미 노래 교실’을 운영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녀가 없는 빈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팬들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떠날 때는 말없이 가버린 그녀를 마음속에 담아 언제나 기억할 것 같다. ‘과거는 흘러갔다’, ‘미사의 종’, ‘애수의 소야 곡’을 부른 나애심과 ‘나 하나의 사랑’, ‘청실홍실’, ‘여옥의 노래’ , ’고향초’를 부른 송민도. 이 전설적인 두 가수의 계열을 이어오던 현미. 허나 그녀의 뒤를 이어 줄 가수가 보이지 않아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요즈음 한국 가요계는 음악 재능보다 비주얼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모두가 공장 제품처럼 개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거의 비슷하여 이름을 확인하지 않고 들으면 도대체 누가 누군지 구별이 되지 않은 실정이다.
현미 같은, 현미처럼, 현미만의 개성 있는 가수가 그립다. 마지막까지 음악 속에서 음악을 사랑하다가 하늘의 별이 된 그녀가 천상에서 데뷔 70년 주년, 75년 주년, 100주년 콘서트를 낭군인 이봉조와 함께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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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