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요트 횡단 원정대의 호놀룰루 기항에 맞춰 환영행사 건을 협의하기 위해 지난 1일 하와이 한인회를 방문했을 때 뜻밖에도 반가운 분을 만났다. 한인 정계 도전사에서 오리건 주상원 3선과 주하원 2선을 합쳐 통산 5선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던 임용근 전의원이 마침 자신의 저서 ‘버려진 돌’ 출판기념회를 하와이 한인회관에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임용근 전 의원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교 시절부터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일했다. 무일푼으로 미국에 와서는 청소부, 정원사, 세탁일, 페인팅 등 온갖 궂은 일을 해가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궜고, 16년간 오리건 주의회를 주름잡았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첫 정계 도전은 오리건 주지사 선거였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한인회 인사들과 점심을 같이 한 자리에서 임용근 전의원은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정치 경력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지난 1990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자 한인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됐고, 주류사회에서는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 봐야 미국 교회 교인과 가족, 친지를 합해 100여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주지사 선거 기간 중 한 유명단체에서 주최한 후보들의 정견 발표가 있었는데, ‘듣보잡’ 임용근 후보는 아예 초청 명단에도 없었다.
주최측에 항의했더니 10명의 지지 서명을 받아오라고 했단다. “아마 10명의 서명을 받기도 힘들다고 봤던 모양”이라고 임용근 전의원은 껄껄 웃었다.
선거 결과는 놀랍게도 공화당 예선에 출마한 7명의 후보 중 2위였다.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웃음거리였던 그는 주지사 출마 덕분에 이름이 크게 알려져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주상원 의원을 3차례 역임했고, 2005년부터 2009년 사이 주하원 선거에 두차례 당선됐다. 임용근 전 의원은 “세상은 도전하는 사람의 편이며, 꿈을 다 이룰 수는 없을지라도 꿈 없이 대업을 이룰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요트 횡단 원정대가 이민 선조들의 항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장정 계획을 알렸을 때만 해도 그들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생각한 한인들이 적지 않았다. 남진우 원정대장은 항해 시간만 3,000여 시간에 이르고 한인으론 드물게 해안경비대가 발행하는 선장 자격증까지 갖춘 경험많은 요트맨이지만 같이 동행하는 다른 대원들의 요트 경력은 일천했기 때문이다.
이들 원정대를 유일하게 믿고 지지했던 사람은 지난 1990년 한인으로는 최초로 태평양 단독 항해에 성공했던 강동석씨였다. 원정대 소식을 듣고 지난 2월 초 LA를 방문한 강동석씨는 “총 항해 시간이 50시간에 불과했던 내가 덜컥 중고 요트를 타고 혼자서 태평양을 횡단하겠다고 하자 가족들은 물론 이를 취재하던 언론인들까지 강하게 만류했었다”고 회고했다.
강씨의 돈키호테식 도전은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난관을 뚫고 마침내 성공했다. 1994년부터 3년여에 걸친 단독 세계일주 항해 과정에선 뒤늦게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게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남진우 대장을 비롯한 4인의 원정대 역시 맞바람과 무풍지대, 세찬 뒷바람과 거센 파도와 사투를 벌이면서도 1차 기항지인 호놀룰루에 무사히 도착,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 남 대장은 “거대한 태평양은 우리의 도전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젠 끝이다’라고 생각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1차 항해를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돈키호테’ 임용근 전 의원의 담대한 도전 이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 전국에서 한인들의 출사표가 이어졌고, 2020년 선거에서 한인 이민 역사상 최초로 4명의 연방 하원의원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캘리포니아만 놓고 봐도 지난 해 11월 중간 선거를 기준으로 연방.주.시의회 등에 포진한 한인 선출직 공직자 수는 18명으로 역대 최다다.
이같은 성과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란으로 바위를 쳤던’ 수많은 한인들의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장 최근에는 인종차별 스캔들로 물의를 빚은 누리 마티네스의 사퇴로 공석인 된 6지구 LA시의원 보궐 선거에 정치 신인 아이작 김씨가 출마, 현재 개표가 진행 중이다. 정치 경험이 없고 선거자금 마저 부족한 김씨의 용감한 도전은, 이번 선거의 승패와 상관 없이, 또 다른 한인들의 의미있는 도전을 불러올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고 정주영 회장은 저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실패와 시련의 차이는 포기에 있다고 했다. 위기의 상황을 맞이 했을 때 좌절하고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실패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련일 뿐이라는 것이다.
120년 전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내린 86명의 이민선조들로 시작된 한인 이민사 역시 망망대해와 같은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언뜻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결과적으로 ‘담대한’ 도전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중요한 것은 결코 꺾이지 않은 마음(중꺾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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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