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법정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사약을 내린 죄명은 청년층을 선동하여 황제를 노엽게 했다는 ‘청년의식 선동죄’였다. 저항시인 김지하도 청년학생층을 선동하고 군사독재 정권을 반대했다며 ‘반공법 위반’, ‘정부 전복 음모’ 혐의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지하는 여러나라 문인, 정치인들의 탄원으로 무기수로 감형돼 살아났다.
매카시즘 선풍이 한창이던 때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도 ‘분노의 포도’ 등 저서를 통해 대지주들의 폭리, 노동력 착취, 소득분배 불공평 등을 비판하여 당국의 수사를 받았다. 김지하와 마찬가지로 스타인벡도 공산주의 세력과는 아무런 연계가 없음이 확인되자 ‘자생적 공산주의자’라는 황당한 판결을 받았다.
이후 무기수 김지하는 수십 차례의 혹독한 고문 끝에 줄곧 교도소 독방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한칸 남짓한 좁은 방, 천정에 전등불 하나 켜있을 뿐 일체의 독서, 필기는 물론 외부인사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가 아내 김영주를 면회한 것이 구속 이후 1년 10개월만이었다.
고독보다 더 혹독한 것은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마저 느낄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단절’이었을 것이다. 출옥 후 김지하는 어느 지인에게 독방에서 때때로 “천정이 나를 향해 내려오고 사방 벽이 마구 조여오는 것 같은 환상이 엄습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석방된 것은 80년 12월, 구속된 지 6년여 만이었다.
출소 후 김지하는 칩거에 들어갔고 침묵을 이어갔다. 자신의 투쟁방법, 방향 등을 재점검하는 시기였다. 그토록 끔찍했던 교도소 독방 고통을 재검토해 봤을 것이다. 김지하를 밀착 취재했던 일본 ‘중앙공론’ 편집인 미야타 마리에(여)는 김지하가 오랜 세월 혹독한 독방 수감으로 ‘폐소 공포증’에 걸렸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동안 그의 침묵이 이어지자 민주화 운동세력으로부터 중상모략이 빗발쳤다. 김지하가 변했다, 배신자, 변절자, 회유, 매수당했다…는 등 인정사정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김지하는 해명 대신 시 한수로 대신했다.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살아오는 삶의 아픔/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는 생각 얕은 일부 소인배들이 어떤 중상모략을 가해 와도 자신의 민주주의를 향한 이념, 독재정권 타도에 대한 신념은 영원하고 단호하다고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었다.
이 무렵 김지하는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투쟁 노선에 경도되었던 것 같다. 191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는 시 ‘동방의 등불’을 써서 한국의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응원해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가를 작사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한 타고르는 무저항 평화주의 노선을 함께 한 간디에게 ‘마하트마’(영원한 영혼) 칭호를 부여하고 시성과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훗날 김지하는 생명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전파하려는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으나 얼마 안 돼 활동을 멈추었다. 그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모진 고문과 관 속처럼 적막했던 오랜 독방 교도소 생활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2015년부터 은둔하다시피 투병, 외출을 삼갔다.
그는 완벽한 ‘시인’ 그 자체였다. 여느 시인들과 달리 관직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정치적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진보다, 보수다, 중도다 평가하는 것은 아둔한 자들의 모독이다. 필자가 김지하 최초의 담시(저항시) ‘오적’이 압수당하고 사상계가 폐간되자마자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아 한민신보에 발표하게 됐던 것을 큰 인연으로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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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