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초에 동갑내기 후배네 8학년 되는 쌍둥이 남매와 10학년 되는 큰딸 그리고 5학년되는 둘째딸과 함께 2박3일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떠났다. 뉴저지 델라웨어간 루트였고 하루에 약 8마일을 걷는 산악 도보였다. 후배네 아이들은 2년 전에도 갔다 온 경험이 있었지만, 우리집 두 딸은 동네 산책도 잘 하지 않아서 망설였는데 의외로 둘 다 간다고 해서 무작정 배낭을 구입해서 떠났다.
7월 초 무더위 속에서 바위와 나무뿌리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산을 걷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특히 우리가 정한 구간에는 물을 구할 수가 없어서 매일 8마일을 꼬박 걸어서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에 도착해야 물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물을 적어도 1리터 이상 가지고 가야하는 고통을 동반해야 했다.
처음 1시간 산길은 그나마 평지여서 걸을 만했다. 그러나 산을 올라가게 되면서 힘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과 물, 그리고 각자의 텐트와 침낭이 든 배낭은 무거웠다. 우리 딸들은 이내 뒤처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산을 오르고 내려가야 했고 평지는 아주 짧았다. 산을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대략 4시간 정도를 걷고서 두 딸은 울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갑자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고 걷는 것이 고통이었다. 그래서 가장 무거운 아이들 짐 2개를 내 배낭에 묶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힘들어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목표로 한 곳에 가야 텐트를 칠 수 있고 물을 구할 수 있다. 여기서 멈추거나 돌아가면 물을 구할 수 없고 또 안전하게 텐트를 칠 수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그리고 뒤따라 가면서 “힘들면 이야기해 아빠가 또 짐을 덜어줄테니 말해라”라고 했다. 다행히도 딸들은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힘이 드니 말도 못하고 그저 앞에 놓인 길을 따라서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 밤을 지내고 그 다음날은 사실 더 힘든 길이었지만 더 이상 울지도 불평도 하지도 않았다.
사실 아이들을 꼬드겨 트레일에 나선 것은 복잡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인내와 강건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자식을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 복잡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자식은 늘 걱정이다. 다칠라, 뒤떨어질라, 심지어 바람 불면 넘어질까 걱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깝고 고와도 자식의 운명을 대신 개척해줄 수가 없다. 다만 자식들이 살아갈 곳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자식들이 세상을 바로 볼 줄 알게, 힘들어도 인내할 줄 알도록 훈련시키고,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여 꼭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하여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2박3일의 트레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다시 두 딸에게 이야기했다. 사람은 모두다 자신의 배낭을 메고 가야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힘들어도 각자의 배낭을 메고 심사숙고해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해야 하고 한번 정한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하는데, 그것을 자꾸 되풀이하다보면 인생이 다 가버리고 해 떨어진 산길을 고단해도 쉬지 못하고 계속 걸어야하는 것과 같아진다. 그러면 인생은 더 위험해진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자식들에게 평화의 시대가 아닌 분쟁과 전쟁의 시대를 물려주는 것이다. 대부분 전쟁의 결정은 인생을 살아본 나이든 사람들이 하고 전장에 나서야할 사람들은 모두다 청춘들이고 가족을 부양해야할 가장들이다.
대결을 부추기고 전쟁을 선동하면 반드시 전쟁은 일어난다. 그래서 부모 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식들에게 평화의 시대를 물려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 인류 모두가 하여야 하는 노력이다.
다민족 다인종의 복잡한 미국사회 속에서 살아가야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는 대결을 부추기는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다른 인종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소수계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인종평등을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인정받는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서 높은 유권자 등록과 투표참여율을 만들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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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