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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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휘(忌諱)

2023-02-1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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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李賀)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글을 짓기 시작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한유(韓愈)가 그 문재를 인정할 정도였다.

‘시의 귀재’로 평가 받았던 이하는 겨우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요절해버린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19살인 A.D. 810년 이하는 진사(進士)가 되고자 장안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휘(諱-이름 자)였던 ‘진(晉)’과 진사의 ‘진(進)’이 같은 발음이라는 이유로 시험을 거부당한다. 그러니까 기휘(忌諱)에 걸린 것이다.


한유까지 나서서 그를 옹호했지만 끝내 과거를 치를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몰린다. 이후 이하는 미친 듯이 술을 마시며 240여 편의 기괴한 시들을 쏟아놓고, 7년 만에 숨을 거둔다.

남의 이름을, 더더구나 웃어른이나 황제, 국왕, 심지어 공자 같은 성인 등 추앙받는 인물의 이름자를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유교문화의 특징이다. 이를 ‘기휘’ 혹은 ‘피휘(避諱)’라 한다.

기휘는 역사적으로 진시황에서 비롯됐다. 그는 자신의 본명인 정(政)자를 피해 당시 모든 인명과 관리 명에 그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정(政)자 속에 들어 있는 ‘정(正)’자도 쓰지 못하게 하여 정월(正月)이라는 말조차 단월(端月)이라 부르게 했다.

황제라는 최고 권력자의 이름자를 저촉하면 어떤 처벌이 따랐나. 멸족이라는 극형을 받은 사례가 비일비재 한 것이 중국의 역사다.

유교문화의 특징인 이 ‘기휘’와 관련해 한국 역사를 살피면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 할 수 있다.

고려에서 조선조에 이르는 왕들의 이름은 거의 다 외자이고 그나마 잘 쓰이지 않는 희귀한 글자를 골라 썼다. 심지어는 사전에도 없는 한자를 새롭게 만들어 이름으로 썼다.

기휘에 걸리지 않게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피해야 하는 글자를 한자라도 줄여 백성들의 편의를 돌보고자 하는 배려의 정신이 스며있다고 할까.


‘정은’ ‘설주’ ‘일성’ 그리고 ‘정일’-. 이 이름들을 북한에서는 함부로 불러도 안 되고 사용하지도 못한다. 같은 이름의 사람들은 개명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엄중한 처벌이 따른다.

북한 3대 왕조 수령들의 이름이고 ‘설주’는 김정은의 아내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북한 판 기휘’리스트에 또 다른 한 이름이 첨가됐다는 보도다. ‘주애’란 이름을 쓰는 주민들에게 이름을 바꾸도록 강요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정주시 안전부에서 ‘주애’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과에 등록된 여성들을 안전부로 불러내어 이름을 고치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과 리설주 사이의 딸인 아홉 살짜리 주애가 지난 7일 부모와 함께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 기념 연회에 참석했다. 이로써 군 관련 행사에 주애가 등장한 것은 지난해 11월 이후 다섯 번이다.

이날 행사에서 특이한 점은 김정은이 아닌 주애를 정 가운데 두고 나이 지긋한 장성들이 마치 병풍인 양 둘러서서 찍은 사진이 실린 것이다. 이와 관련, 워싱턴포스트지는 사실상 김주애가 후계자로 점지된 분명한 신호라는 분석을 내놨다.

그러니까 기휘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 것은 ‘백두혈통’ 후계자로서 김주애의 높은 위상이 반영된 조치로 풀이된다는 것.

9살짜리 딸을 후계자로 선정, 그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는 김정은 체제. 평양의 시계는 도대체 몇 시를 가리키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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