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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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신

2023-02-11 (토) 이보람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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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머니께 전화를 건다. “어머니, 저희 검정 여행 가방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응. 그 가방 서재 벽장 아래에 있을 거야.” 남편 출장 준비를 하느라 짐가방이 필요했는데 어디 있는지를 몰라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정말이지 그곳에 가보니 그 캐리어가 거기에 있었다. 어머니에게 찾았다고 감사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누가 보면 이상한 광경이지만 우리 집에선 늘 있는 일이다. 시어머니는 내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신다. 정리의 신이라고 불릴 만큼 어머니는 정리에 일가견이 있으시다. 그래서 초보 주부인 나를 도와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림 정리를 해주시고 동선 및 쓰임새에 맞춰 물건들의 자리를 찾아 주셨다. 이사 들어오는 날에도 이삿짐센터 직원에게 각 방에 어떤 가구가 들어가야 하는지와 어떤 짐보따리가 어디에 가야 하는지가 어머니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직원이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며 “이 집은 친정어머니가 참 잘 도와주시네요.”라고 해서 내가 시어머니시라고 정정하자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어느 집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본인 살림살이를 만지는 것도 싫어한다는데 나는 어머니가 정리해 주시면 집안이 훨씬 깔끔하고 편리하여 좋다. 내게 부족한 점을 어머님이 채워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어머니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처음엔 조심스레 이렇게 가구의 위치를 바꿔도 되는지 이건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 하고 물으셨는데 이제는 알아서 편하게 하신다.

한 번은 우리 집 부엌에 세로로 놓인 아일랜드의 위치가 답답해 보이셨는지 가로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셨다. 나는 그래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며 아일랜드는 무거우니 남편이랑 도와줄 손이 있는 날 함께 바꿔 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돌아가셔서 그 아일랜드 위치를 얼른 바꿔 보고 싶은 생각에 잠이 안오셨단다. 그다음 날로 오셔서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혼자 그 무거운 아일랜드를 열심히 밀어서 자리를 바꿔 놓으셨다.

“어머니, 이 무거운 걸 혼자 옮기셨어요?”라고 묻자 어머니가 멋쩍게 웃으셨다. 들어 있던 온갖 그릇들을 다 빼고 낑낑 거리며 이 돌덩이 같은 아일랜드를 혼자 밀으셨을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니 고맙고 또 죄송했다. 결론적으로 가로로 놓인 아일랜드 덕분에 부엌과 거실이 훨씬 넓어 보이고 동선도 더 편리해졌다.

어머니가 한국에 가셔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면 나는 어머니 오실 날을 기다리게 된다. 어머니 손길을 기다리는 내 살림살이들이 여기저기 아우성을 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오셔서 조금만 마법을 부리면 금세 집안이 환해진다. 정리 못하는 며느리 흉볼 법도 한데 어머니는 각자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어머니의 정리법을 좀 배워 어머니 도움 없이 깔끔하게 살아볼까 싶다가도 어머니에게 의지하며 어머님 손길이 여기저기 닿은 이 집이 좋아 게으름을 피워본다.

엊그제는 어머니가 남편의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해 주시며 애아빠에게 잔소리를 하셨다. 장가가서도 늙은 어미 청소를 시켜야겠냐며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가 열 맞춰 정리해 둔 서류뭉치와 정갈하게 놓여 있는 문구들, 차곡차곡 정갈하게 개켜 넣은 그의 옷들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엿본다. 내일은 또 무엇을 못 찾아 어머니에게 전화를 할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언제까지나 이런 부족한 며느리 전화에 피식 웃으시며 “못 찾겠으면 내가 가서 찾아줄게.”라며 금세 달려오셨으면 좋겠다.

<이보람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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