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간혹 이 난을 이끌어가다 보면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왜 이 글을 계속 쓰고 있을까? 혹시 신문의 귀중한 면을 할애하며 취미생활에 불과한 그런 낙서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을 써보니 가장 힘든 것이 지식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의 완급 조절이다. 단순한 글이나 평범한 칼럼이 아니라 뭔가 살아움직이는 그런 생명력있는 이야기를 전한답시고 때로는 과욕을 부리기도 한다.
지난 글을 읽어 보면 스스로도 이해 못할 그런 글들도 많다. 글이라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데 늘 과욕으로 망치게 되는 것이 스스로의 한계이기도 하다. 도(道)라는 것이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한계를 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절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서구 음악을 접하다 보면 가끔 도의 체험같은 어떤 불가사의한 경지를 체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학식이나 자기 수양도 부족한 필자가 道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道’라고 하면 질문과 해답이 공존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 한다. 즉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다면 이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이 ‘道’의 기본적인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불교가 됐든 기독교가 됐든 혹은 유교, 도교가 됐던 질문이 존재한다면 나름대로의 해답이 존재하는 것이 종교의 모습이다.
음악은 이와 다르게 질문보다는 해답이 먼저 존재한다. 즉 음악을 들으면 정신이 상쾌해지고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을 체험하게 되곤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사람의 정신적인 짐을 내려놓게 만드는 것이 음악 예술의 또다른 이면이지만 아마도 하이든의 음악들에서 이런 道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영적 피로를 내려놓게 하는 모습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필자가 하이든의 음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하이든의 음악에는 음악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른 예술가들에서는 엿보기 힘든 절제의 미학이라는 것이 있다. 즉 ‘딱 거기까지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음악뿐 아니라 인생의 다른 면에서도 요구되는 중요한 미덕 중의 하나지만 대체로 그 어떤 예술도 중도가 실현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다익선이라 크면 클수록 좋고 감동의 힘이든 선율적 아름다움이든 셀수록 좋은 것이 어쩌면 인생의 모습처럼 음악의 또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서구 음악은 20세기 초 점차 난해해지면서 장엄한 낙조처럼 시들고마는데 20세기 초는 베토벤의 시기와도 견줄 만큼 서구 음악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 시벨리우스, 프로코피에프, 스크랴빈, 야나첵, 드뷔쉬, 라벨, 엘가, 거쉬인, 코플랜드, 말러, R. 스트라우스, 쇤베르크, 푸치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작곡가들이 이때 등장한다.
그러나 서구(특히 독일) 음악은 나치의 출현을 겪으면서 급격한 반성모드로 돌아서게 된다. 전쟁은 나치가 했는데 피해는 음악이 독박 쓰게 된 경우라고나 할까. 아무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수많은 음악가들이 전범 재판에 서게 되며 나치에 협조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도 뒤바뀌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휘자를 비롯한 음악가들 대부분은 유태계거나 나치와 관련없던 인물들이다. 토스카니니, 번스타인, 게오르규 솔티 등은 유태계이거나 나치를 증오했던 인물들이었다. 음악과 전쟁… 다소 상관없는 것 같지만 사실 음악만큼 2차 세계대전이라는 피의 역사에 있어서 그 중심에 섰던 예술도 없었다. 나치는 자신들의 폭력성, 국수주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베토벤의 강렬한 비애, 바그너의 선을 향한 저항의식 등은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을 때려 죽이고 장엄하게 전사하고 싶은 의(義)로운 분기가 폭포수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모두 나치가 (당시 핀치에 몰려있었던 독일국민을 향한) 떡밥으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의 모습이었다. 하이든의 예술은 이런 떡밥과는 전혀 무관한, 道가 있었다. 좋게 표현하면 과유불급, 나쁘게 표현하면 조금 부족한 면이 그것이었다. 베토벤같은 비애도, 바그너같은 저항도, 모차르트와 같은 선율적 흥분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이든은 교향곡 등을 무려 104곡이나 남겼으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간지대(음악)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음악이 지항하는 바, 넘쳐서 손해볼 것이 전혀 없었는데도 하이든의 음악은 꼭 적당한 선에서 멈춰서는 절제의 내공을 선보였다.
하이든의 이러한 모자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왜냐면 절제란 우선 외관상으로 젠틀맨적인 맵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늘 유머가 넘치며 끝맺음이 깔끔하다. (필자가 좋아하는 것은 여기에 더하여 유교적인 공손함이랄까, 음악을 신선놀음으로 풀어가는 여유 등이다.) 베토벤은 하이든의 ‘천지창조’(오라토리오) 악보를 받아들고 감동한 나머지 들고 있던 악보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아마도 하이든의 교향곡 등에 이같은 존경을 표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10개도 힘든 교향곡을 104곡이나 남긴 의지야말로 도취의 요소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언제까지 이끌어갈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음악 이야기의 가장자리에 머물다말겠지만, 바라건대 다른 어떤 강렬함이나 능력 밖의 솜씨보다는 하이든의 예술과 같은 절제, 오직 즐거움으로… 폭포수처럼 울리는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한조각 한조각 동양화처럼 이 난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축복은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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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