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내 총기 난사사건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2년 전에 있었던 정치 폭력 사태도 다시 떠올랐다. 2021년 1월6일, 미국의 극우 보수 세력이 연방의사당에 난입했던 일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상 최대의 불행한 사건이었다. 정치의 폭력화가 극에 달했던 이 사건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말끔히 단죄되기는커녕 미국 전체가 회복되기 어려울 만큼 둘로 쪼개져버렸다.
민주주의의 막장드라마를 보여준 미국의 정치 폭력사태를 모방해서인가, 지난달 브라질에서 대통령선거에 패배한 보우 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와 대법원, 대통령궁 등에 난입 해 난동을 벌인 폭력사태는 그대로 미국의 판박이였다. 물질문명이 양산하는 각종 사회 폭력과 함께 정치의 폭력화가 일상화돼가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주의에 절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막스 베버는 ‘폭력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고 메리엄은 정치의 폭력화는 ‘실정(失政)의 고백’이라고 했다. 한국 역사에서도 집권세력의 정치역량이 한계에 달했을 때 늘 정치의 폭력화가 극심했다. 과거 자유당 정권이 민심에서는 멀어졌는데 정권은 더 연장하고 싶고- 그래서 꾸며 낸 것이 3.15 부정선거였다.
1960년 들어 서민생활은 어려워지고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67명의 압사사건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백주에 깡패를 동원해 대통령에 나가려는 장택상 의원의 등록서류를 탈취했고 선거 당일에는 곳곳에서 사전투표, 공개투표를 자행했다. 그 결과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최측근 이기붕 가족은 자결, 내무장관 최인규, 법무장관 홍진기, 치안국장 이강학 등은 모두 혁명재판소의 피고석에 앉는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나는 4.19 혁명 전후의 한국 정치사를 ‘아, 그날’이라는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가 2020년 4.19 혁명 60주년을 맞아 한국의 국립 4.19 민주 묘지에 기증해 지금 그곳 전시관에 전시돼있다. 다시는 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지말자는 뜻이었으나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도 정치의 폭력화는 계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등 반대편 인사에 가한 폭력은 잔인하기 그지없었지만 자기당내 사람들을 일렬로 줄 세우며 괴롭혔던 만행도 가증스러웠다. 1971년,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등 측근 중진들이 3선 개헌에 협조하지 않고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에 동조했다고 해서 중앙정보부로 연행해 콧수염을 뽑아내는 인간이하의 수모와 고문을 가한 뒤 정계에서 쫓아냈던 일화는 유명하다.
전두환의 폭정은 박정희 시대와 비교해 기만과 위선이 한층 능숙해졌다. 1980년, 900명이 넘는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켜놓고는 자신들이 한일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었다. 이에 해직언론인들 스스로 백방으로 찾아 나선 결과 20년 만에 전두환 군부가 만든 해직언론인 관련 문서를 발견해낸 사례가 있었다.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백성은 그것을 반복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인간의 삶에서 폭력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거나 정치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하면 그것은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끊임없이 찾아내고 기억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응징보다는 계속되는 역사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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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