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가 일어난 지 어느새 55년이 됐다. 1968년 1월21일, 북한의 124부대 소속 특수원 31명이 완전무장을 하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남한으로 침투해 소란을 피웠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우리나라 정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들 31명 중 29명은 사살됐고 한 명은 도주하여 북으로 복귀했으며 남은 한 명은 대한민국에 투항했다. 투항한 사람이 김신조 소위이고 그 이름을 따서 이 사태를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정부는 그를 생포했다고 발표하고 생중계 기자회견을 가졌다. 남파된 목적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정희 모가지 떼러 왔수다.”라고 답했다. 전 국민 모두가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도 우리 군경이 신속히 대응해 더 큰 참사를 막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내 견해는 다르다. 오히려 우리의 군경은 전혀 신속하지 못했다. 나무꾼 우씨 형제들이 아니었으면 우리의 역사는 변했으리라.
그 해 1월21일은 일요일이라 대통령이 관저에 있는 날이고 24절기 중 추위가 가장 심하다는 대한이 있는 기간이었다. 공비들은 일부러 이 때를 골라 작전을 개시했다. 임진강이 꽁꽁 얼었기에 도보로 쉽게 건널 수 있었고 무장을 감추려면 외투를 입어야했기에 겨울을 선택했다. 공작원들은 16일 밤 출발, 19일에 이미 파주 법원리 삼봉산에 도착했다. 여기서 뜻하지 않게 땔감을 구하러 온 우씨 4형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방해꾼이 생기면 죽이고 땅에 파묻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꽁꽁 언 땅에 시체를 묻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시체를 잘못 처리했다간 저들의 정체가 바로 발견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공비들은 회의를 했고 결국 우씨 형제들을 회유하고 살려주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다. “우리는 북에서 온 인민군 선봉대다. 일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라며 일부러 행선지를 거꾸로 알려줬다. 덧붙여 “6개월 후면 통일이 되는데 그 때 와서 크게 포상을 할 것이니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 혹시라도 어기면 가족들 모두 몰살할 것이다.”라고 협박을 했다. 우씨 형제들은 신고 안 하겠다 약속했고 침착함을 잃지 않아 그들의 의심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산한 형제들은 그 길로 파출소에 가서 신고했고 곧바로 나라 전체에 경계태세가 발령됐다. 하지만 우리의 군경은 오판을 한다. 산속이니 그들의 이동속도는 빨라야 시속 8킬로 정도일 것이라 생각하고 추적에 나섰는데 실제 이들의 평균시속은 10킬로가 넘었다. 뒤만 따라가다가 번번이 검문을 놓쳤고 공비들은 예정대로 21일 청와대 코앞인 세검정에 나타났다.
천만다행으로 여기서 경계태세에 있던 종로경찰서의 최규식 총경이 이들을 저지하자 전투가 시작됐다. 최 총경은 안타깝게도 기관총을 맞고 바로 순직한다. 이 사건은 군, 경, 민간인을 포함해 8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김일성의 계획은 실패했다.
1.21 사태 하면 투항한 김신조, 순직한 최규식 서장 등은 기억하는데 정작 나라를 구한 우씨 형제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씨 형제들이야말로 적화통일의 순간에 우리나라를 구한 영웅들이다. 고학력을 지닌 요즘 젊은이들과는 달리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한 나무꾼들이었지만 반공방첩 정신이 투철한 애국자이자 영웅이란 사실을 나라와 온 국민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씨 형제 네 분(우희제, 우경제, 우철제, 우성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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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공인회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