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귀족노조’ 프레임

2023-01-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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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모든 낱말은 뇌의 프레임 회로를 통해 정의된다. 그래서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면 자동적으로 ‘엄청나게 큰 권력을 지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호칭이 붙은 사람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대통령의 영어 단어인 ‘president’는 원래 회의나 의식을 주재하는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단어처럼 엄청난 권력자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의 해악이 지속되고 있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와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훌륭한 조합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언어가 우리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투는 정치는 결국 ‘언어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언어싸움에서는 대부분 보수가 우위를 보여 왔다.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언어전쟁에서 지는 쪽은 언제나 진보진영이다. 진보진영에는 듣기 싫은 얘기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보수진영은 프레임 짜기에 아주 능하다. 보수진영의 프레임은 교묘하고도 효율적이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감세를 ‘세금구제’(tax relief)라는 프레임으로 포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감세 혜택의 대부분이 부자들에게 집중됐음에도 이 프레임은 서민들이 푼돈 감세에도 감지덕지하도록 만드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사이에 계속돼 온 싸움 역시 그렇다. 그 싸움에서 진보는 거의 항상 열세였다. 반면 보수의 프레임 전쟁에는 거침이 없다. 금기란 애초부터 없어 보였다. 사회정치적 이슈들에 툭하면 ‘친북’ ‘좌파’ ‘종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고 반대세력의 움직임은 ‘불법’과 ‘폭력 난동’으로 규정하는 낡고 오래된 프레임 전략으로 국민들의 의식을 장악해 왔다.

취임 후 너무 낮은 지지율로 고전하던 윤석열 대통령이 지지율 반등의 계기를 잡은 것도 ‘프레임’ 전략의 덕분이었다. 지난해 말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가 파업에 돌입하자 사상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책임자들은 파업을 ‘핵 위협’ ‘이태원 참사와 같은 재난’ ‘조폭’ 등에 비유하며 비난했다. 정부가 당초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대한 언급이나 사과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노조를 공격할 때면 전가의 보도처럼 어김없이 등장하는 ‘귀족노조’ 프레임이 빠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하루 15시간씩 한 달 내내 화물차를 몰아 고작 300만원 내외를 손에 쥐는 운전기사들이 ‘귀족’으로 둔갑해 보수 정치 세력과 보수 언론들의 거친 공격을 받았다. 파업에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윤석열 정부에 효과를 안겨줬다. 줄곧 20%대에 갇혀있던 대통령 지지율이 노조 총공세 이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를 보고 있다고 판단해서인지 이후 공세는 한층 더 거세졌고 그런 흐름은 새해 들어서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조에 대한 인식조사를 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타난다. 노조라는 조직이 보다 절실할 것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 계층에서 노조에 대한 불신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귀족노조’ 프레임이 그만큼 잘 먹히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귀족에겐 노조가 필요 없다. 따라서 귀족노조란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한 노조원의 절규가 떠오른다. ‘

정치세력과 언론들의 프레임 공세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아주 복잡한 사안은 귀찮아하면서 되도록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우리의 ‘인지적 구두쇠’ 성향은 손쉽게 이들의 프레임에 걸려들게 만든다. 그런 만큼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균형 잡힌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깨어있는 시민, 깨어있는 뉴스소비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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