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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 클래식] 베를린에 울려 퍼진 종묘 제례악

2022-12-09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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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베를린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대공연장에서 한국의 종묘 제례악 공연이 사상 처음으로 열려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바 있다. 한, 독 문화협정 50주년을 맞아 독일의 초청으로 열린 이날 공연은 우레와 같은 박수가 무려 15분가량 이어졌으며 음악의 고장 베를린의 한복판에서, 한국음악이 구현한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그동안 종묘 제례악은 2015년 파리 공연에서도 절찬받은 바 있었지만 판소리와는 다르게 종묘 제례악같은 궁중음악이 유럽의 청중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구 음악도 이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며, 한국의 전통 음악도 각광받는 시기가 도래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튜브 등에 나와있는 베를린 공연의 종묘 제례악을 직접 들어 본 바에 의하면 문화 차이나 형식의 이질감보다는 음악이란 모두 보편적으로 같다는 것이었다. 서구음악처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동양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은 서구음악과는 또다른 것이었으며 다소 결이 다른 음악을 보여주고 있을 뿐 동양이든 서양이든 음악이 지향하는 바 그 근본 방향은 같다는 것이었다.

눈부신 과학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아직도 원시적인 요소가 많은 분야 중의 하나로 취급받는 장르 중의 하나였다. 인류의 음악에 대한 관심(도)에 비해 음악은 여전히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혹은 한국의 가야금 등이 인간이 연주하는 악기의 전부이며 보다 나은(?) 악기의 진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음악은 일부 퇴보(?)해가는 경향 조차 보이고 있는 편이다. 즉, 한때 인기를 끌었던 인도의 전통악기 시타르 등에 대한 서구인들의 열광이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팝 아티스트 조지 해리슨(비틀즈 멤버), 바이올린의 대가 유디 메뉴힌 등은 인도의 시타르 음악에 매혹되어 시타르의 대가인 라비 샹카르에게 연주법을 배우는 등 한동안 시타르 붐을 조성하여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신비의 소리를 들려 준다는 시타르 소리를 직접 들어보면 서양의 바이올린 등에 비해 조금 다른 소리를 들려주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해금 등에 비해 그렇게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악기의 차이나 그 성능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의 요소도 동양은 단선율, 서양은 화성을 발전시킨 것 외에 특별히 동서양 음악의 다른 점은 많지 않다. 서양에 오페라가 있다면 한국에는 판소리가 있다. 문제는 그 분야에 미쳐있는 인구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판소리에 비하면 서양의 오페라는 그 인구가 훨씬 많은 편이다. 서양의 오페라(극장)는 전세계에 없는 곳이 거의 없지만 판소리는 한국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페라가 세계화된 데에는 꼭 그러한 지엽적인 요소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엘렉트라’ 등을 보고 있으면 왜 사람들이 오페라에 열광하는지를 알 수 있다. 푸치니의 ‘라보엠’이나 ‘토스카’ 같은 작품도 인기있지만 그런 대중성과는 별개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엘렉트라’와 같은 작품은 무대 위의 연기자와 북소리만 가지고도 오페라란 얼마나 강렬한 효과를 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했다. 오히려 ‘엘렉트라’는 하나의 연극을 위해 음악이 희생된 것이 바로 신의 한 수가 된 작품이었다. 소음같은 오케스트라, 미학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가수의 음성… 음악의 진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한 가수의 탄생, 악기의 발명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숨은 예술적 소재를 찾아 무모한 도전을 마다않는 인간의 무한 도전과 바로 그 광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때로 서양음악에 대하여 부러움과 시기… 또는 경멸찬 시선을 보내기 조차 한다. 그러나 서양음악이란 서양인이 키가 크다고 해서, 합리적인 사고와 일찍부터 과학을 발전시켜왔다고 해서 오늘날의 서양음악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양 음악이 오늘날의 서양음악이 된 것은 어쩌면 동양적인 동경을 음악을 통해 실현시켜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음악에 대한 도전과 사랑… 그것은 피리를 불어도 울 줄 모르는 세상에서, 마치 영혼이 맥박 칠 수 있는 동맥을 찾아 헤매듯… 처철한 추구이기도 했다.

지난 9월, 베를린에서 열린 한국의 종묘 제례악 공연은 우리도 이제 서구음악에 대한 콤플렉스에 벗어날 때가 됐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600년 전의 한국음악이 서구인의 귀에 마치 여지껏 전혀 들어보지 못한 현대음악 처럼 비쳐지고 있는 것은 음악이 지향하는 바 그 (정신적인) 목표가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구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또는 동양의 전통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하등 다를 것은 없다. 오히려 서구 음악과 더불어 성장한 우리(세대)의 서구 음악에 대한 지나친 동경과 콤플렉스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동양을 내려놓지 않으면서도 서양을 동시에 포옹할 수 있는 균형감각이야말로 어쩌면 우리 세대가 극복해야할 앞으로의 과제이며 또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콤플렉스인지도 모른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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