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상]망각의 동물

2022-11-26 (토) 안세라/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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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높던 어느 날, 남편과 드라이브를 하면서 신호에 걸려 잠시 대기중이였다. 그런데 같이 정차한 옆 차 안에서 갓난아기가 고래고래 울고 있었다. 창문 넘어 그 소리가 들릴 만큼 우는 소리가 꽤 컸다. “아이유, 애기 엄마가 너무 힘들겠다”라고 말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말한다. “세라야, 우리 애들 기억 안나? 우리 둘째는 저것보다 더 크게 울었는데.” 순간 내 자신에게 놀랐다. 그래,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이 그랬던 것도 같은데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이 나지 않고 마치 남편이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둘째가 그렇게 울었다고? 저 아이처럼 저렇게 울었다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둘째가 겨우 세살인데 나는 겨우 삼년 전 일도 기억을 못하게 된 것일까?

남편과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한 지 겨우(?) 7년이 되었지만, 결혼생활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가 분명히 있었다. 크게 싸우면서 등을 돌리고 잤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도대체 그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남편의 어떤 점 때문에 싸우게 됐는지 뭐가 맞지 않아서 그렇게 서로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며칠 밤을 속상해했는지 이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흔히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을 보면 우리 인간들의 기억의 수치를 잘 볼 수 있는데, 그 사실이 참 흥미롭다. 우리는 단 일주일만에 기억의 80퍼센트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911 응급차를 타고 영화같은 상황에서 첫째 아들을 만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마치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출산의 경험도 어느덧 그 기억을 잊고 다시 둘째 아들을 만난 것을 보면, 망각은 인간 생존의 조건, 적어도 나의 생존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다퉈서 등을 돌렸으면서도 지금 사이좋게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학습한 것을 더 오랜 시간동안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복 학습만이 해법이라고 한다. 슬프고 좋지 않았던 순간을 더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에 반복 학습 따위는 당연히 필요가 없겠다. 망각곡선을 달리 보면 시간은 늘 흘러가고 있고, 영원한 기억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 생활, 매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도 행복했던가. 오늘 하루 나의 남편과 나의 아들들과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졌던가. “예스!” 그럼 된 거다. 매일이 ‘예스!’가 될 수 있게 더 노력해야겠다.

<안세라/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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