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예찬Ⅱ
2022-10-22 (토)
박인애 시인·수필가
오늘도 앞뜰에 나가 가을 땡볕 아래서 분꽃 씨를 받았다. 꽃들이 눈만 마주치면 자기 새끼를 부탁한다고 불러대는 것 같아서 안 나갈 수가 없었다. 건강할 때는 딸내미와 누가 더 씨를 많이 따는지 시합도 했는데, 허리가 안 좋으니 몸을 굽혀 채종 하는 것도 일이었다. 올해는 그냥 두자고 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늘어나는 씨들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플라스틱 통을 들고 화단으로 나갔다. 나 몰라라 하면 분꽃 어미가 얼마나 서운해할까 싶기도 하고, 자연 발아의 귀재인 씨들이 땅에 떨어져 저마다 한자리 씩 차지하고 나온다면 내년에는 화단이 밀림 수준의 분꽃 천국이 될 것 같아서 거두는 중이다.
첫날은 씨가 얼마나 많던지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꽃 진 자리마다 알알이 씨가 맺혔는데, 어떤 건 꽃이 씨에 붙은 채로 말라서 영락없이 신생아 배꼽에 붙은 탯줄 같았고 어떤 건 이미 씨방을 탈출하고 없었다. 그 높은 데서 뛰어내리다니 겁쟁이라는 꽃말이 맞는 건가 싶었다. 대부분은 꽃가마에 탄 새색시처럼 씨방 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내다보며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앉아 있는 걸 보면 내성적, 소심, 수줍음 그런 꽃말이 맞는 듯도 했다.
시월인데 여전히 모기가 극성이다. 사납고 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텍사스 모기에게 물리면 족히 한 달은 고생한다. 약을 뿌리고 나가도 소용없다. 뜨거운 곳에 서식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독하다. 씨를 따려면 어쩔 수 없이 구역 모기에게 피를 상납해야 한다. 허리통증보다 가려운 게 괴로워서 ‘오늘은 내가 씨를 말려 주마’ 하고 따도 다음날 나가보면 또 그만큼 나오니 분꽃을 다산의 여왕으로 등극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씨를 따고 있으면 운동 나온 주민들이 한마디씩 하고 간다. 꽃이 예쁘다고, 혹은 냄새가 좋다고. 기르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친절한 인애 씨는 꽃씨를 나눠 주고 꽃말과 파종법을 설명해 준다. 베트남 아주머니 집으로 시집간 분꽃은 얼마나 컸는지 그 집 뜰이 분홍분홍하다. 옆집에 하수도 공사를 하러 온 인부가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씨가 잔뜩 든 통을 보여주며 내년을 준비하는 거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 예쁘다고 하기에 꽃씨를 나눠주었다. 지인들에게 씨앗 나눔을 한 게 족히 15년은 된 것 같다. 새로 이사 온 아주머니가 자기 고향 집에도 있다며 몹시 반가워했다. 분꽃은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꽃인가 보다. 노인들은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던 분꽃을 추억하며 눈물을 짓기도 한다. 나무를 다듬던 남편이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내 말을 재생하더니 그분께 씨를 나눠주라고 했다. 오지랖도 전염이 되는 모양이다.
사흘 후면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니 채종이 늦긴 했다. 올해는 개화도 늦었다. 한해는 많이 피고 한해는 덜 피는 거라고 책에서 읽은 상식으로 잘난 체를 했는데, 아니었다. 책이나 인터넷은 분꽃을 잘 모른다. 올해도 또 하나 체득했다. 늦을 수는 있으나 제 몫을 다한다는 것을. 책에 제시한 개화 시간과 시기 등의 숫자 역시 지역에 따라 다르므로 큰 의미가 없다. 실패와 경험이 나를 분꽃전도사로 만들었다. 기르며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분꽃은 밤에만 피는 야행성 꽃이 아니라는 거다. 낮에도 그늘만 있으면 활짝 피었다. ‘FOUR O’CLOCK‘이란 별명은 해가 져야 피는 꽃이라 붙은 거다. 그래서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분꽃이 피면 저녁밥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한해살이풀이 아니라 다년초다. 한번 심으면 매년 저 혼자 피고 진다. 서리 맞은 후엔 위만 잘라주면 다음 해에 거기서 다시 피니 그러하다. 유전자의 법칙을 벗어난 종이라는 것도 알았다. 전에 살던 집에서 색을 구분하지 않고 씨를 섞었다가 합방을 시킨 바람에 2세대는 분홍, 노랑, 노랑에 브리치 한 분홍 등 그나마 예쁜 꽃들이 다양하게 피었는데, 3세대에 가서는 몽땅 물감을 흩뿌린 것 같은 얼룩 분꽃이 된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사 온 후 구역을 나누어 심었다. 경계선이 문제였다. 그리도 일렀건만 이것들이 언제 합방을 했는지 노란 분꽃이 분홍 브리치를 하고 피어났다. 자기 맘대로 가출하여 만난 걸 어쩌랴. 사람도 꽃도 사랑에 빠지면 답이 없다. 살인 더위와 가뭄 속에서도 살아남은 강인한 분꽃도 서리가 내리면 관절이 꺾이며 주저앉는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했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산파 역할을 해주었으니 내 몫은 한 거다. 잘 말려 보관하는 일만 남았다. 올해는 틈새가 좁은 빨래망에 넣어 아버지 한약방 천장에 걸려 있던 약재처럼 바람 통하는 곳에 걸어 두었다. 여느 때보다 잘 마를 것 같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꽃을 피워내는 분꽃을 보며 배운 게 많다. 나도 목표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심고 뿌리는 중이다. 2022년이 이제 두 달 남았다. 설령 기쁨으로 단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도 최선을 다했으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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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