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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核)에는 핵으로’

2022-10-10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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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러시아, 러시아.”

루한스크, 도네츠크, 헤르손, 지포리자.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의 4개 주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15%에 이르는 이 지역이 러시아의 영토로 공식 합병됐음을 선언하면서 푸틴이 내뱉은 슬로건이다.

2022년 9월 30일이었던가. 그날 크렘린 궁에서 열린 합병행사 연설에서 푸틴은 서방을 ‘사탄’으로 지칭했다. 과거 소련식의 얼토당토 아니한 프레임 씌우기 수법을 동원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서방이란 악마에 대항해 싸우는 성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리고 영토수호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핵무기 사용의 선례’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히로시마 폭격을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이다.

크렘린 궁에서 펼쳐진 그 날의 합병행사와 푸틴의 발언. 이는 핵무기 사용을 위한 예비조치가 아닐까 하는 것이 일부의 관측이다.

그러니까 푸틴이 정식으로 합병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주는 명실상부한 러시아의 영토가 됐다. 그런데 이 지역을 우크라이나가 공격한다면 러시아는 자국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을 갖추게 됐다. 푸틴의 괴기한 논리에 따르면 하여튼 그렇다는 거다.

이와 함께 재차 던져지고 있는 질문은 푸틴은 과연 핵무기를 사용할까 하는 것이다.

“핵 보유 국가가, 더구나 재래식 전투에서도 전술핵무기 사용을 가능토록 규정한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위협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한다.” 존스홉킨스대학의 일리엇 코언의 지적이다.

이 같은 지적과 함께 코언은 푸틴의 핵위협 발언을 다목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풀이했다.

푸틴의 핵사용 시사발언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4월 키이우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서방의 개입을 경고하면서 핵사용 가능성을 흘렸다. 이후에는 잠시 조용했다.


여름이 지나면서 전황은 일변했다. 러시아군은 하르키우에서 굴욕적 패배를 맛봤다. 뒤이어 또 다른 전략요충지인 리만이 함락됐다. 헤르손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1~2만 병력의 러시아군은 포위된 상태에서 전멸될 수도 있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이처럼 전황이 러시아군 패배로 굳어지면서 푸틴의 핵사용 위협 발언의 수위도 높아가고 있다. 하르키우 대패 후 30만 예비군 부분 동원령을 발표한 지난 9월21일 발언에서도 푸틴은 핵무기사용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시사했다. 그리고 열흘이 못가 또 한 다시 핵위협을 해댄 것이다. 히로시마까지 들먹이면서.

바로 이점에 주목하면서 핵 공격 위협은 패전 만회를 위한 푸틴의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핵공포 심어주기가 또 다른 목적인 것으로 보았다. 미국과 독일 등 서방을 타깃으로 핵전쟁 공포를 극대화시킴으로서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는 노림도 숨어있다는 것.

이 핵 공포감 극대화 작전이 주효할 경우 77년 동안 지켜져 온 핵 불사용 금기(nuclear taboo)가 깨지는 동시에 이는 국제정치의 게임 체인저가 된다는 것이 미 의회 전문지 더 힐의 분석이다.

중국, 북한이 당장 푸틴의 핵 공갈 수법을 모방할 수 있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도 핵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때문에 서방으로서는 푸틴의 핵 위협에 결코 뒤로 물러설 수 없다.

그러면 어떤 효과적 대처방안이 있을까. ‘핵에는 핵으로’가 일부에서 제시되는 방안이다. 그렇다고 미국과 나토가 핵 대응에 직접 나서라는 것은 아니다.

푸틴이 핵 버튼을 누른다면 그 타깃은 우크라이나가 될 공산이 가장 크다. 그 우크라이나에 전술 핵무기를 제공해 핵 공격을 핵으로 대항케 하는 옵션을 워싱턴은 고려할 때가 됐다는 것이 리얼 클리어 디펜스의 주장이다.

존스홉킨스대학의 코언도 비슷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러시아의 핵 공격으로부터의 자위를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물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 터키, 카자흐스탄, 핀란드 등에 전술핵무기를 공급하거나 공유하는 방안을 주창한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이해도 걸려 있다. 핵 불사용 금기가 깨지면 중국과 북한의 핵 위협으로부터의 자위를 위해 대만, 한국, 일본도 핵무장에 돌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나 여전히 푸틴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달렸다. “극도로 고립돼 있다. 그 푸틴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원령 발동과 함께 새로 수 십 만의 병력이 투입되면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 포린 어페어스지의 분석이다.

그런데 1차, 2차 공세 때처럼 또 다시 푸틴의 플랜대로 되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발생할까. 러시아군은 계속 패배를 거듭하고 푸틴의 핵 공갈을 무시하고 서방이 더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설 경우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러시아군의 궤멸속도로 보아 빠르면 수 주 후, 늦어서 내년 봄이 그 결정적 타이밍이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그 누구보다 몸이 달아 있는 것은 러시아의 파워 엘리트들인 것으로 포린 어페어스지는 지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에게는 존망이 달린 실존적 전쟁이 아니다. 푸틴 개인에게 실존적 전쟁이다. 그러니 푸틴과 함께 파멸의 불구덩이 속에 빠져들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인식이 점차 확산되면서 크렘린 내부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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