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이 되면 고국에서는 국군의 날(1일)로 시작해 개천절(3일)이 있고, 9일이면 성군 세종대왕께서 집현전 학자들을 모아 연구시킨 끝에 세계 문명사에 길이 빛나는 한글을 창제한지 576돌이 되는 한글날(9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7년전인 1975년 나는 동대문 야구장 앞에 위치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몇가지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 중 하나는 바로 1년 위 선배들이 쉬는 시간에 각 반을 돌면서 각자 속한 특별활동반을 소개하면서 우리 신입생들의 가입을 권유하러 다니던 일이다. 상업학교답게 주산반, 부기반은 물론 원예반, 문예반, 밴드부 등의 다양한 특활반의 선배들이 쉬는 시간마다 들어와서는 저마다 자신들의 반으로 가입하라며 열심히 광고하는 내용을 흥미있게 들었다.
놀랐던 것은 불과 1년 위일 뿐인데 도대체 어찌도 그리 어른스럽게 교탁에서 근사하게 발표를 잘 할 수 있나 하던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말 지켜쓰기 운동’ 반에서 온 어떤 선배가 한 발표는 한글날이 올 때마다 뚜렷한 기억으로 반추하게 된다. 근 반세기 전의 일이니 그 선배의 말을 조목조목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세종대왕이 창제한 아름다운 우리 한글이 당시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래어에 위축되지 않도록 우리는 가능한 외국어를 배격하고 소중한 우리말을 잘 보존하고 지켜 써야하지 않겠느냐며 열변을 토할 때 솔직히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말 대단했다.
그로부터 거의 오십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언어란 해당 문물이 시작된 곳에서 비롯된 사물의 전달체계라, 비록 외래어일망정 그러한 문물을 수입하는 입장일 때는 우리가 그걸 억지로 한글로 만들어 보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낭비적인 일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인터넷, 팹리스, 시스템 반도체, 스마트 폰, 전기차, 스페이스X 로켓, 아스테로이드 우주선 충돌실험’ 등등 밀려오는 신문명의 쓰나미 속에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한글로만 전용해 표시하겠다고 날밤을 새우려 했다가는 숨 가쁘게 발전하는 문물을 따라잡기도 전에 탈진하고 말 것이다. 오히려 김치나 K-Pop, 오징어게임과 같은 K-드라마처럼 우리의 우수한 문물을 세계로 퍼뜨림으로서 자연스레 외국에서도 따라 쓰게 하는 방향으로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한글이 우수한 글이라는 것은 인도네시아 어느 오지 마을에서 한글을 공식표기 알파벳으로 사용하기로 했다는 수년전의 보도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아전인수식 단순한 자기만족의 차원을 넘어 국내외적으로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객관적 사실로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한글이 그렇게 우수한 글이라지만 과연 개선해야 할 점이 전혀 없는 무오한 글 체계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우선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외국어가 많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오픈마인드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한글로는 영어의 th 나 f, r 등을 표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늘 가는데 항상 따라다니는 ‘실’을 말하는 thread 는 과연 쓰레드인가, 뜨레드인가? 아니다, 그 중간의 발음인 것이다. 우리가 밥을 지어 먹는 쌀(Rice)은 미국인들에게 종종 우스갯거리가 되는 머릿니 라이스(lice)가 아니라 ‘롸이스’라고 쓰고 발음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 Star는 ‘스타’가 아니라 끝부분의 혀를 말아줘 굴리는 발음으로 ‘스타아’라 해야 보다 정확하지 않은가.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리는 ‘얼굴’ face는 페이스도 훼이스도 아닌 역시 그 중간발음인 것이다.
물론 외래어 표기에 관한 제안일 뿐이지만 이렇게 몇 가지만 간단히 개선해도 한글이 표기할 수 없는 한계는 크게 줄일 수 있고 반대로 한글의 소통성은 훨씬 확장시킬 수 있다. 576돌 한글날을 앞두고 조국을 떠나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렇게 가만히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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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팔로알토 부동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