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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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2022-09-06 (화) 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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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벼는 벼끼리 살아간다. 한 날 한 시 싹터 한 날 한 시 베어진다. 잘났다고 웃자라도 안 되고, 못났다고 우울해도 안 된다. 서로 기대고 껴안으며 닮은꼴로 자란다. 들풀들이 살던 풀밭은 반듯한 논이 되었다. 논은 사원처럼 엄숙하고 고요하다. 농부들이 정성껏 분무한 화학적 향기가 자욱하다. 고만고만한 동갑나기들 지혜로만 익은 벼들이 황금빛으로 물결친다. 고귀한 낱알은 흙에 떨어지면 안 된다. 모래 한 알, 풀씨 한 톨 섞여도 안 된다. 쥐도 새도 안 되고 사람의 밥이 되기 위해 생을 다한다. 한 시대를 버티게 해주던 시를, 또 다른 시대에 꺼내어 햇볕에 말린다. 반칠환 [시인]

<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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