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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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바이러스

2022-09-03 (토) 정혜선 / 몬트레이 국방외국어대학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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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2년이 지나도록 다행히 나는 아직까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았지만 ‘한류 바이러스’에는 드디어 확실히 걸려버렸다. 한류하면 뭐니뭐니해도 드라마다. 몇 달 전 학교에서 ‘나요’라는 동사어미를 가르치다가 2008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오는 노래, 태연이 부른 ‘들리나요’를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학생들이 완전집중해서 노래를 듣는 동안, 나는 내가 처음으로 정신없이 빠져서 봤던 한류 드라마의 장면들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수업이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 드라마의 동영상들을 찾았고 두루미씨가 회식에서 머리로 술잔들을 들이박으면서 동료들한테 화풀이를 시원하게 해대는 감칠맛 나는 파격의 순간이 유레카의 순간이 되었다! “알았다, 바로 이거구나, 한국 드라마(한드)가 한류가 된 이유가…” 나는 원래 논픽션 체질이라 드라마 보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10년 전 어쩌다 보기 시작한 ‘베토벤 바이러스’는 클래식 음악과 순수한 내용 때문에 내가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며칠 내로 끝장을 본 드라마였다. 새벽 2시가 넘도록 보고 단잠을 잤는데도 정확히 출근 준비 시간에 맞춰 일어난 건 나만의 ‘전설’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본 지 10년이 넘어서야 뒤늦게 한류 바이러스에 확실히 “감염되었다”는 ‘자가진단’을 하게 되었다. 각본과 연기를 포함해서 한국의 드라마 제작은 한국의 독보적이고 특화된 재능임을 마음으로 깨달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왜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오냐고 툴툴거릴 게 아니라 무엇이든지 각 나라의 민족만이 가진 독특한 재능으로 인정받으면 된다는 깨달음까지도 보너스로 얻었다. 무엇보다도, 한드에서는 어떤 외국인 한류팬이 말한 것처럼, 미드에서 보기 힘든 인생에 대한 착한 교훈을 찐하게 느낄 수 있다.


2018년 봄, 예기치 못한 수술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불안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스마트 폰으로 다시 본 ‘베토벤 바이러스’의 장면들은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들처럼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있어야할 곳에 있을 때 느껴지는 것임을 가르쳐주었다. 괴팍한 강마에조차도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게 지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카리스마가 쩔었다.

작년에는 학생들과 ‘사랑의 불시착’을 보면서 한드가 갖는 반전의 매력에 홀렸고 지난주에는 ‘우리들의 블루스’를 혼자 보면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싹트게 하려는 고군분투에 눈물을 흘렸다. 다음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볼 참이다. 우리 학생들도 내가 걸린 바이러스에 몽땅 걸렸으면 좋겠다.

<정혜선 / 몬트레이 국방외국어대학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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