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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 클래식]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2022-08-26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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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 ‘이거다’ 하는 것은 없다. 듣고 즐기면 그만이다. 즐긴다는 표현은 조금 경박한 표현일 수 있지만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사실 음악이라는 낱말 자체가 한자의 낙(樂)에서 유래한 것이니 결과적으로 음악은 즐긴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드라마같은 것에는 ‘樂’보다는 ‘극(劇)’자를 쓴다. 演劇(연극), 喜劇(희극), 悲劇(비극) 등... 해석해 보면 호랑이(虎)와 돼지(豕)가 싸우는데 상대가 안되니까 돼지에게 칼자루를 쥐어준다는 뜻이다. 그러면 한판 싸움이 될 수도 있으까. 조금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드라마에서 자극이 없으면 김빠진 맥주다. ‘劇’이 성립될 수 없다. 조금 유명하다 싶은 드라마나 영화들은 모두 자극적이다. 피를 흘린다든지, 천재나 정신병자 하나쯤은 등장해야 볼 맛이 있다. 지난 주는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음악을 들으면서 한 주를 보냈다. 유튜브 연주도 보고 CD 등을 들으면서 사색도 하고 감동(樂)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뿔피리 교향곡’으로 알려진 교향곡 2,3,4번 등을 들으면서 말러의 슬픔, 말러의 아름다움에 대해 사색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말러의 세드(Sad)한 선율은 언제들어도 청명한 하늘처럼 맑고 가냘픈 여운으로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 주곤한다. 그런데 왜 말러일까?

약 10여년 전 본보에 개제됐던 말러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건축가이자 목사이기도 했던 그 분은 뉴욕 타임스의 기사들을 인용, 서양음악 작곡가 중 위대한 10명 중에 말러가 포함되지 않은 점에 주목하였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분의 관점에서 말러는 결코 영향력있는 작곡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품의 분량이나 작곡 분야 또 내용면에 있어서 결코 바흐나 베토벤, 심지어 슈베르트나 하이든 등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요즘 음악회에서 사람들이 말러에 열광하는 것은 마치 베스트셀러와 명작이 다른 것처럼 일시적인 현상내지 인스턴트 푸드의 유행쯤으로 간주하는 듯 했다. 일부 맞는 듯하고 또 일부 틀린 듯 보이는 관점이었는데 아무튼 말러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말러라는 존재가 현대 예술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80년대 초까지만해도 말러라는 이름은 없었다. 없었다기 보다는 방송이나 음악회, 심지어 음악 감상실 등에서도 거의 들을 수 없는 작품이었는데 이는 말러의 곡이 워낙 심각하고 길다보니 프로그램 편성이 힘들었고 또 말러를 아는 이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경우 80년대에 미국에 와서 말러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알게된 정도가 아니라 미국의 FM 방송 등에서는 말러의 교향곡 연주회를 자주 방송했을 뿐 아니라 심포니홀 등에서도 말러의 음악은 단골 메뉴였다. 교향곡 2번 ‘부활’, 1번 ‘거인’ 심지어 연주인원 천 명까지 동원된다는 ‘천인 교향곡(8번)’도 인기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다. 클래식 음반을 팔던 타워 레코트 같은 곳에도 말러판은 늘 차고 넘쳤다. 이름하여 말러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말러가 이미 죽기 전에 자신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했다는 점이다.

말러는 반유대주의자이며 후에 나치의 절대(?) 신봉자로 추앙받게 되는 바그너의 작품을 알리는데 주력한 소위 가장 주목할만한 바그너빠였다. 말러는 자신을 바그너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예술이 크게 환영받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말러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는데 그것은 나치 이후 세계 음악계가 바그너 예술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말러의 음악 역시 붐을 타지 못했는데 거의 사장될 뻔했던 말러의 음악이 살아남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말러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계 음악가들은 2차대전 이후 말러의 예술을 적극 홍보했고 부르너 발터, 오토 클렐펠러, 솔티, 번스타인 등을 거치면서 말러의 음악은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진정한 말러붐이 조성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말러 만들기의 일등공신은 전세대 말러 알리기에 주력했던 유대계 음악가들이었다.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는 원래 19세기 초 독일의 시인 아힘 폰 아르님, 클레멘스 브렌타노 등이 수집한 민중시 모음집이었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민족주의 사조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고 후속 시리즈로서 두 권이 더 출판되었다고 한다. 현대에는 거의 읽히지 않고 있지만 구스타프 말러의 가곡집으로 유명하게 되었고 특히 교향곡 2,3,4번을 ‘뿔피리 교향곡’으로 불리울만큼 말러의 초기 교향곡에 크게 영향을 미친 작품이기도 하였다. 말러의 뿔피리 교향곡 중 하일라이트로 치는 3번의 마지막 악장에서는 청중석과 연주회장의 조명을 급격히 어둡게 만드는 트랜드가 있는데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음악이 그만큼 심각하게 흐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내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진정한 말러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다소 과장된 요소와 ‘어린아이 뿔피리’의 순수한 모습이 동시에 랑데뷰돼 있는데 그것을 감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위장(?)인지를 체험하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유튜브 등을 통해 그 승부를 엿볼 수 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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