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남매? 정말 오남매라고?” 오늘도 상대방의 눈엔 의구심 반, 놀라움 반의 감정이 섞여있다. 그럼 나는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며 하나씩 접어 나간다. “네. 딸, 딸, 딸, 아들, 아들이고 제가 첫째예요.” 요즘 시대에 오남매가 웬 말인가? 나도 가끔은 내가 오남매의 장녀라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어렸을 때는 오남매라고 말하는 것이 괜스레 창피하게까지 느껴졌다.
맏이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 돌보기가 주된 일과 중 하나였다. 내가 처음 혼자 버스를 탄 것은 초등학교 일 학년 때이다. 엄마는 1번 버스를 타고 서초어린이집 앞에 내려서 동생을 데려 오라고 했다. 엄마는 분명 이 버스를 타면 서초어린이집 앞 정류장에 내려줄 거라고 했는데 버스는 서초어린이집 직전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했다. 나는 버스 기사 아저씨가 다시 돌아 서초어린이집 앞에 내려줄 것이라 굳게 믿고 1번 버스 종점인 정릉까지 갔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나는 그렇게 몇 시간째 행방이 묘연한 실종아동이 되었고 내가 그 1번 버스를 다시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우리 집은 제법 큰일이 벌어진 듯한 분위기였다. 내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어린이집에서 왜 동생들을 데리러 오지 않느냐는 전화에 우리 부모님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나를 찾아 온 거리를 헤맸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어떻게 초등학생인 나를 믿고 혼자 버스를 태워 유치원생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했을까? 그날의 혹독한 버스 홀로 타기 체험 후, 나는 버스와 지하철로 온 서울 시내를 다 다닐 수 있는 어린이로 성장했다.
우리 세 자매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셋만 달랑 기차에 실려 부산까지 간 적도 있다. 물론 하차시간에 맞춰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와 계시긴 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부모님은 내 여동생들을 일찍이 먼 미국 땅에 유학 보냈다. 그래서 둘째와 셋째는 중학생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컸다. 부모와 떨어져 자랐는데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잘 자라 제 앞길 잘 가는 동생들을 보면 기특하다. 부모가 옆에 꼭 붙어 전전긍긍하며 키워도 개차반인 애들도 수두룩한데 말이다.
나랑은 열 살이 넘게 차이나는 남동생 두 명은 우리 세 자매가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 어린 동생들과 같이 다니다 시집도 안 간 처자가 젊은 새댁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남동생들은 어느새 우리들 키를 훌쩍 넘어 이제는 고개를 들어 보아야 할 정도로 훤칠해졌다. 열심히 사는 누나들을 봐와서인지 고맙게도 말썽 없이 잘 자라 주었다. 이제는 곧잘 집안일도 돕고 조카들과 놀아주는 것을 보니 내리사랑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유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동생들과 이리저리 동네 골목을 휘젓고 다니면서 재미있게 논 기억이 많다. 지루할 새도 외로울 틈도 없었다. 동생들은 단순히 내게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불러내 놀 수 있는 좋은 벗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은 한 명 없어져도 티 안 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집에 한 명만 없어도 온 집안이 허전하다.
나는 줄곧 우리 엄마, 아빠는 한분씩이니까 그들이 줄 수 있는 사랑도 한 사람이 해낼 몫에서만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조금씩 나눠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다섯 배 더 풍부하게 사랑받고 사랑하며 자랐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제는 내가 오남매의 장녀라고 소개할 때 조금 더 힘주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나도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둘째를 낳기로 결심한 것도 내가 형제, 자매와 함께 크며 누렸던 것들을 내 아이도 누리며 크길 바랐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다. 정말이지 두 아이 모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소중하고 귀하다. 부모님에게도 우리가 그랬을 것이다.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렇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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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람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