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되게 피곤해 보여(You look very tired).” 어느 날 저녁, 함께 일하는 동료가 나에게 말했다. 그 날은 일이 하루 종일 많기도 했을 뿐 더러, 한국에서 돌아온 뒤 여독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피곤한 기색이 얼굴에 비치는 것이 당연한 날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은 그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모니터 화면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까? 내가 너무 피곤해서 과민반응 하고 있는 건가? 영어로는 잘 듣지 않는 말을 들어서 그런가? 찰나의 순간에 든 여러가지 생각을 뒤로 하고 신경 써주어서 고맙다는 짧은 말을 남겼다.
그 뒤로 종종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 켠에서 불편한 감정이 들곤 한다. 언젠가부터 피곤해 보인다는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대를 지나고 대학원을 마칠 때 즈음까지도 사실 누군가가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해 주면, 그 말이 되려 나를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말인 것 같았다. ‘너 열심히 하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어. 마음이 아프네. 응원해’ 라고 들리던 말이 요 몇 년 사이에는 ‘얼굴이 너무 상했어. 관리 좀 해’ 라거나 ‘좀 생기있게 웃고 다녀. 내가 불편하잖아’ 라는 말이 되어 나를 콕콕 찌르는 말이 되어버렸다.
사실 불편하지만 종종 듣는 말들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제 마냥 어린애 같지는 않아 보이니 너도 나이가 많이 들긴 했나 보다’ 라던가, ‘네 나이면 피부 관리도 이제 늦었어’ 또는 ‘너도 필라테스나 헬스 같은 거 하니? 러닝만 하면 엉덩이가 납작해져서 안돼’와 같은 외모에 대한 말들이다. 30대 후반에 들어서도 외모에 관한 지적을 받고 있다니, 한숨과 함께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나이가 되면 그런 지적에서 자유로워 질 줄 알았다. 그런 말을 무덤덤하게 받아 칠 만큼의 내공이 덜 쌓여서 일까? 이런 류의 말을 듣고 나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살고 있는 기분이 들고 만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준을 빗대어 내 얼굴과 몸을 훑어보며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주근깨가 많은 얼굴, 둥근 어깨, 갓난 아기처럼 통통한 팔과 다리를 살펴보고 나면 나라는 사람을 부족한 것 밖에 없는 사람인 기분이 들고는 한다.
한국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외모에 관한 지적을 끊임없이 받고 자란다. 몸과 외모에 대한 압박과 기대, 지적은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받아봤을 것이다. 이런 지적을 받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에서 여성은 정형화된 몸과 외모의 기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남성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의 윗 세대 남성분들은 그런 지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지금은 남자들도 화장을 하고 몸을 가꾸는 것이 ‘자기 관리’의 한 부분으로 인식된다. 소셜미디어와 뉴스기사들만 봐도 지나치게 마르고 정형화된 외모에 집착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여자 배우들이나 아이돌들이 얼마나 살을 뺐는지, 얼마나 말랐는지, 반대로 남자 배우들이나 아이돌들은 얼마나 근육을 늘렸는지를 그들의 커리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아직 미성년자인 여성들의 신체를 콕 찝어 가르키고 적나라하게 성적 대상화하는 부끄러운 표현들이 기사의 제목으로 유유히 쓰인다 (예는 도저히 부끄러워 들지 못하겠다). 40대가 지난 여성들에게는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으로 쓰이며, 산후조리에 한창인 여성들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몸을 지적하며 스스럼없이 ‘후덕해졌다’는 표현을 쓴다.
영어로 말하면 self-care인 ‘자기 관리’는 아무리 봐도 이상하리만큼 외모에 집중되어 있다. 자기 만족을 벗어나 취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이어트나 성형을 하는 현상은 이미 보아온 지 오래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외모는 기계의 성능처럼 ‘스펙’이 되어 등급으로 나뉘어 지고, ‘착한,’ ‘못된’, ‘이상한’과 같이 성격을 부여되기도 한다. 살이 좀 찌거나, 머리스타일이나 피부 상태 등등 외모가 아주 특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자기관리를 못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세상에 넘쳐나는 험하고 모난, 뾰족하고 거친 말, 행동, 생각들을 살아낸 나와 그 마음을 보살피는 것이 자기 관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수는 없을까? 더 나아가 다양한 몸에 대한 인식은 언제쯤 바뀌게 될까?
몸을 바라보는 언어가 한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정된 언어는 그 언어 밖의 몸을 비정상으로 보고 규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도 이런 몸에 대한 언어와 시선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둥글어서 누군가가 기대어도 편한 어깨가 나에겐 있고, 통통해서 우리 강아지가 눕기 좋은 허벅지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 밑에서 생겨난 나의 주근깨는 태양만큼이나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들을 상기시켜주어 나를 꽤 강한 사람처럼 생각하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시간을 쏟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사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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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