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에서 약 4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과 약 14만명의 한국 군인들이 전사했다. 무모한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은 죽었고, 출전했다가 다행히 살아남은 청년들은 진학할 기회를 잃었다. 나의 큰 오빠는 전사했고, 둘째 큰 오빠가 대학으로 진학할 기회를 놓친 장본인이었다.
휴전되고 나서 미국의 한 독지가 여성은 나의 둘째 큰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제안했다. 그렇게 둘째 큰 오빠는 미국에서 학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해서 골프채 만드는 회사 사장, 또 다른 사업체들의 CEO, COO로 활약했다. 전쟁을 겪고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데 이바지한 오빠 세대들이 받았던 도움을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이 미국 땅에서 되돌려 베풀고 있다. 바로 내 고등학교 동문이 마음을 모아서 한 일이다.
남가주에는 700명이 넘는 동문이 살고 있다. 동문회의 미션 중의 하나가 사회봉사이다. 동문을 만나 그리움을 달래고, 회포를 푸는 것은 디아스포라 삶에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봉사의 미션도 그 이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문회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있었던 2005년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태풍 피해자들을 도왔고, 코비드 사태가 시작된 2020년에는 오고 갈 곳이 없이 락다운 된 한국출신 유학생들을 도왔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곳에 유학중인 학생들을 찾아내어 장학금이 아닌 생활보조금 1만8,000달러를 모아서 나누고 있다.
뒷담이지만, 우크라이나 유학생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워싱턴 DC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사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엘에이에 있는 우크라이나 문화센터에 연락을 넣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동하고, 감사하면서 학생들의 데이터를 찾아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행정부와 문화센터에는 유학생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없었다.
결국 UC 대학들에 연락을 하고, 학생들을 찾아내었다. 연락된 학생들은 모두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차적으로 CSUN(Cal State University of Northridge) 3명의 학생들과 관계자들을 만났다. 한 학생당 2,000달러를 전달했다. UCLA 한명, UC 버클리 5명에게 역시 같은 금액이 곧 전달된다.
오빠 같은 청년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준 그 여성 독지가처럼, 우리 디아스포라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행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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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모니카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