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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 르네상스

2022-07-15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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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음악) 애호가로 사는 것은 언뜻 고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클래식 애호가로 사는 것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생음악 감상은 몇몇 상류층에서나 가능했고 대체로 오디오를 통한 음악 감상이 대부분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 ‘별표 전축’ 등 국산 오디오가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음질은 별로였고 음악 감상은 대체로 PX 등에서 흘러나온 외제 오디오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가 오디오를 구입할 수 없었던 일반 서민들은 음악 감상실 등을 찾아다니며 음악 감상의 목마름을 해결하곤 했는데 그 중 종로의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은 서울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전혜린 등 대한민국에서 알만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찾던 명소이기도 했다. ‘르네상스’는 원래 대구의 박용찬씨가 1951년에 문을 열기 시작한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이 그 원조라고 한다. 1954년 서울로 감상실을 옮겼고 1960년부터 종로 1가 영안빌딩 4층에서 영업했는데 내가 출입할 당시에는 입장료가 4백원이었다. 당시 영화 개봉관의 입장료가 2백원-3백원이었으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시간 제한 없이 종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다방처럼 생긴 카페테리아가 나오고 유리벽 사이로 약 50평 규모의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꽉 차면 약 1백50명 정도가 들어찰 수 있는 규모였다고나 할까. 친구와 같이 갔을 경우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나 우유 등 간단한 음료를 즐길 수 있었고 극장 매표소 같이 생긴 구멍으로 음악을 신청할 수 있었다. 서울에는 ‘돌체’, ‘무아다방’, ‘필하모니’, ‘쎄시봉’같은 음악 감상실이 많았는데 클래식 위주의 음악 감상은 대체로 ‘필하모니’, ‘르네상스’ 등에서만 이루어졌다. 특히 명동의 ‘필하모니’와 종로의 ‘르네상스’는 규모 면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종로의 ‘르네상스’가 더 많은 음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역사 면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이곳을 거쳐간 음악가만도 윤이상, 정명훈, 정경화, 나운규 등이 있었고 문인으로는 시인 천상병, 김동리, 전혜린, 송영 등이 단골이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화가 김환기, 변종하 그리고 영화인 신상옥과 김희갑 등도 르네상스의 단골 인사들이었다고 한다. 르네상스는 80년도에 들어 오디오의 대대적인 보급과 더불어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1987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르네상스’에는 동양에서는 최초로 JBL 하츠필드 스피커라는 진품 대형 스피커가 있었고 당시로선 고가였던 꿈의 오디오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가 있었다. 그러나 약 1만5천 여장의 LP 그리고 꿈의 오디오는 당시 클래식 애호가들의 피난처이자 음악에 갈증을 느끼던 자들에게 정신적인 영양을 제공했던 구심점 역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당시로선 구하기 힘들었던 LP 판이나 고급 오디오, 스피커 등의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음악 감상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약 30여년간에 걸친 감상실만의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또 다시 ‘음악 감상실’이 재현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앞으로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몇몇 사람이 모여 음악 감상을 즐길 수는 있겠지만 ‘르네상스’처럼 몇 십년을 그렇게 음악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서 함께 모여 현실을 토로하고 음악에 위로를 받는 그런 피난처 역할로서의 음악 감상실은 앞으로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르네상스’는 종로 1가라고하는, 한국의 정치 일번지이자 동시에 학원가 등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홍대 앞, 대학로 등도 있었지만 종로 1가는 일반인, 학생, 예술가 할 것 없이 가장 교통이 편하고 찾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고삐리는 물론 예술인, 학자, 일반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편한 장소로서 사랑받았던 곳이다. 이곳은 명동의 ‘필하모니’와는 달리 괴짜 감상인들이 모이는 곳으로도 유명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광적으로 지휘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풍토는 전혜린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나올 때마다 일어서서 미친 듯이 지휘한 뒤 ‘에트랑제(방랑자)들이여 당신들의 낙원 르네상스에서’라는 메모를 돌리고 담배 등을 배급한 데서 시작됐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이같은 기행에 대해 아무도 이상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르네상스’의 풍토이기도 했다. 종로 거리는 늘 총총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로 분주했지만 감상실 안은 항상 포근하고 여유가 넘쳤다. 지금도 브람스 등 실내악 곡들을 듣고 있으면 늘 예전의 음악 감상실의 모습이 떠 오르곤 한다. 미국가는 비자 발급이 늦어지면서 당시 나는 많은 시간을 음악 감상실에서 소비할 수 있었다. 물론 뜻하지 않은 여유가 주는 초초함도 있었지만 정말 삶에서 무릉도원이 있었다면 당시의 그 짧은 휴식기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 분위기에서 듣던 브람스의 소나타… 그리고 당시 차갑게 목을 타고 흘러가던 밀크 한 잔의 추억… 너무도 먼 메아리… 그러나 동시에 도도하게 흐르던 낙원의 여유… 그리고 찢기듯 울리던 바이올린의 느끼한 낭만…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문학이었다. ‘르네상스’를 추억하는 모든 자들과 함께...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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